수락산역에서 내려 걷다가 건물을 끼고 돌아서면 커다란 바위로 웅장함을 주는 수락산을 마주하게 된다. 그 밑으로 한적함을 주는 마을이 있다. 마을을 둘로 나누는 도로 옆으로 조그마한 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한자로 귀천정이라 적힌 정자와 해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아저씨와 두 꼬마의 동상이 있다. 두 아이는 아저씨에게 놀아달라며 매달리지만, 아저씨는 귀찮아하기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있음에 행복해한다. 그 옆으로 조금 멀찍 떨어진 곳에는 강아지가 아저씨의 한쪽 신발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
일상적인 평범한 삶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동상을 보고 있자니, 오늘날에 잘 보기 힘든 정다웠던 어린 시절의 향수에 빠지게 된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상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로 존재했던 천상병 시인이다. 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천상병 시인(1930~1993, 이하 시인 생략)의 대표작인 <귀천(歸天)>을 접해봤을 것이다.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노후에 쓴 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천상병이 자신의 삶과 생각을 옆에서 들려주듯 편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쓴 시를 곱씹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천상병 시가 처음부터 편한 것은 아닌 듯하다. 너무도 어렵고 힘들었던 세상살이를 이겨내고 달관하면서 나온 결과다.
천상병은 일제강점기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광복하던 1945년 마산으로 돌아왔다. 뛰어난 문학적 소질은 마산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김춘수의 눈에도 특별해 보였다. 타고난 문학적 소질에 샘솟는 창작욕을 가진 천상병은 학창시절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마산중학교 5학년 때인 1949년에는 동인지 <신작품>을 발간하고,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는 등 젊은 천상병은 꿈을 가진 반짝이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어려워진 생활은 천상병을 문학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쟁 중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췄던 천상병은 생계를 위해 195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상과대를 중퇴하며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가족들과 주변에서 거는 기대가 매우 컸기에 서울대학교를 중퇴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 시절 쓴 시 <갈매기>로 정식 등단한 천상병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높았다. 천상병은 중퇴 이후 <현대 문학>에 매달 비평을 싣고, 외국 서적을 번역하며 더 많은 공부를 해나갔다. 그와 함께 자신의 창작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2년 동안 부산시장 공보비서로 일한 것이 전부였던 천상병은 늘 가난했다. 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던 일이 천상병의 삶을 크게 바꿔놓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인들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으며 용돈도 조금씩 받아 생활하던 천상병을 중앙정보부가 잡아들였다.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사건(동백림은 동베를린을 지칭하는 것으로 1967년 독일에 유학생활을 했던 윤이상, 이응로 등 194명을 간첩 활동을 했다고 잡아들였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상병을 잡아들여 3개월 동안 전기 고문 등을 하였다. 그리고도 3개월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실제 천상병은 동독 유학을 다녀왔던 친구 강빈구와 막걸리를 먹으며 500원, 1,000원 용돈을 받았다. 이는 당시 천상병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문인들이 생활하던 일방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천상병이 5만원에 가까운 돈을 강빈구에게 갈취했다며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우려했다. 혐의는 인정되지 않고 풀려났으나, 남은 것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올바른 사리판단을 할 수 없는 정신착란과 불편해진 몸이었다.
결국 천상병은 동백림 사건 이후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어 영양실조에 걸렸다. 여기에 어눌해진 말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면서 타의적으로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 소식을 모르던 지인들은 천상병이 죽었다 생각하고, 그 동안의 천상병의 작품을 모아 유고시집 <새>를 발간했다. 유고시집 <새>는 천상병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나온 우리나라 최초이자 마지막 유고시집으로 기록되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천상병은 다행히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고, 친구의 여동생이던 목순옥과 결혼하며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준 아내는 천상병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몸과 정신이 건강해진 천상병은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아내를 향한 고마움이 담긴 시 <나는 행복합니다>는 천상병이 아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향한 원망과 자조적인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여기에 고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그의 고뇌도 담겨있다.
나는 행복합니다.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
텔레비젼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랑병(炳)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천상병은 죽기 얼마 전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동화집을 출간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와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던 천상병이 얼마나 평범한 삶을 꿈꾸었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누구에게는 너무나 소소한 일들이지만,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를. 그래서 <난 어린애가 좋다>를 보면 천상병이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함께 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난 어린애가 좋다
천상병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천상병은 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돈과는 인연이 없었다. 천상병이 죽고 들어온 조의금을 잘 보관하기 위해 장모가 아궁이에 숨겨놓은 것을 몰랐던 아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태워버렸다. 비록 돈과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오늘날 천상병은 많은 이들이 기리고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과 인천 강화도에 천상병 동상이 이를 증명한다. 천상병 시인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시와 이를 통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