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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24. 2020

김동인 동상에 친일문학가를 표시하자.





일제강점기 35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다. 자아가 형성되는 10대 시절을 기준으로 보면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일제강점기 전후로 태어났다. 망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인도 많았다. 또는 일제를 부정하고 저항하다 변절한 이도 많았다.
 
친일파의 경우 공과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평가해야 하지만,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에서 잘못이 감추어진 경우가 너무도 많다. 광복하고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핍박한 변절자들이 넘쳐났다. 이런 변절자 중에서도 다른 친일파를 비난하여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춘 치졸한 인물이 있다. <배따라기>,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등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을 발표한 김동인이 대표적이다.
 
김동인(1900~1951)은 평양교회 초대 장로이자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김대윤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던 김동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만 하면,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김동인은 15살에 일본에 있는 도쿄학원을 거처 메이지 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으나 많은 유산을 받았기에 학업을 유지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부친상을 마치고 가와바타화숙에 편입하여 공부를 이어가던 김동인은 순수문학에 푹 빠졌다. 문학작품에 시대적 상황이나 이념 등이 반영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19년에 자신의 자비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倉曹)>를 간행한다. 이때 주요한도 발행인으로 참여하며 <창조>는 우리 문학사의 큰 획을 긋는다.


하지만 1919년은 독립에 대한 당위성과 기대감이 한층 고조되었던 시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패전국가 식민지들의 독립은 일본 유학생들에 큰 울림을 주었다. 김동인도 이광수와 2·8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재일본공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행사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하루 만에 석방된 김동인은 귀국하여 3·1운동 격문을 기초하다가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때의 체포로 김동인의 마음에서 자라던 애국의 싹이 잘려버렸다. 이후 김동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겠다고 다짐했다. 어떠한 독립운동도 부질없는 행위라 여겼다. 모든 일이 자신이 생각하는 데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한 번의 좌절로 세상을 탓하는 못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이후 김동인은 순수문학운동을 주장하며 <창조>의 뒤를 이은 <영대>를 발행했다. <영대>에 김소월도 참여하며 우리 문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식민지 현실을 부정한 무책임한 행동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김동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학가와 언론인들을 비난하며,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한 예로 이광수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자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순수문학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던 김동인도 1932년에 조선일보 학예부에 근무하게 된다. 사고의 전환이 생겼다기보다는 토지 관개 사업으로 큰 손실을 봤기 때문이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던 시기 순수문학을 표방할 수 있었던 김동인은 30년대부터 현실에 타협한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이라는 소문을 소재로 삼은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37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일제를 위한 글을 썼다. 1938년에는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찬양하는 글로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김동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39년 ‘북지 황군 위문작가단’으로 한 달 동안 중국에 있는 일본군을 위문했다. 억지로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김동인이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제의했고, 참여할 친일문인작가를 섭외했다. 중국에 가는 비용도 출판사와 문인들이 직접 부담케 하는 활동 덕분에 김동인은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친일행각을 하던 김동인은 일제로부터 일인으로 인정받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친일행각을 해도 한국인은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1942년<매일신보>에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는 글에서 일왕을 ‘그 같은 자’로 표현했다가 불경죄로 8개월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김동인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더욱 적극적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다. <반도 민중의 황민화> 작품을 연재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문학가로서 선봉에 섰다.






그런 김동인에게 일제의 패망은 충격이었으나, 삶 자체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친일 문학가들을 비난하여 자신을 감추면 되었다. 한 예로 ‘북지 황군 위문작가단’ 등 오랜 세월 함께해왔던 이광수를 극렬하게 비판했다. 1946년에 이광수를 비난한 <반역자>란 제목의 단편은 김동인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 자신은 '조선어(조선문학)'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며 정당화시켰다. <망국인기>를 통해서는 자신을 일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파렴치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김동인은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며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해방 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중 1949년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김동인은 1·4후퇴 때 가족들이 몸이 불편한 그를 놔두고 피난 가면서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 채 말이다. 확실한 것은 자신을 위해 친구와 민족을 팔아버린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버림받아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죽어가며 두려움과 배신감 등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단, 자신의 뉘우침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김동인이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다시 살아났다. 1955년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 56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조선일보사가 넘겨받아 오늘날까지 동인문학상을 주관하고 있다. ‘동인문학상’은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큰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김동인의 이름은 계속 알려지고 있다.
 

순수문학을 추구할 당시의 작품들은 재미있고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순수문학을 추구하던 당시의 작품까지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그러나 친일행각이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친일행각을 알리고, 독자와 후손들이 평가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어린이대공원에 가면 김동인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 있는 김동인의 동상은 인자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김동인문학비’라고만 적혀있다. 과거에 제작되어 친일행각을 표시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지금도 하기보다는, 이제라도 친일 문학가였음을 알리는 표시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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