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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31. 2020

신분을 넘어 왕이 된 김유신


백범광장 김유신 동상


김유신 장군(595~673, 이하 장군 생략)만큼 후대에 논쟁이 큰 장수가 있을까?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중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광활한 만주를 잃어버리고, 사대주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받아들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면 서로 다른 민족과 국가로 인식하던 고구려·백제·신라를 통일하여, 하나의 민족의식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고려 시대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통일을 ‘선왕(김춘추)께서 백성의 참혹한 죽음을 불쌍히 여겨 지금의 귀중한 몸을 잊으시고 바다 건너 당에 가서 황제를 뵙고 친히 군사를 청하였다. 그 본의는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구히 전쟁을 없애고, 여러 해 동안 깊이 맺혔던 원수를 갚고 백성의 죽게 된 목슴을 보전코자 함이다.’라고 평가했다. 일연 스님도 <삼국유사>에서 ‘김춘추가 김유신과 함께 신통한 계획으로 힘을 합하여 삼한을 통일하고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라고 평가했다.

반면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다른 종족을 끌어들여 같은 종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불러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는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바이거늘, 슬프다! 우리나라 역사가여~ 이를 아는 자가 매우 적구나.’라며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특히 “김유신은 지용이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하기가 사나운 독수리 같았던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큰 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자”라고 비난했다.


진천 길상사


한 가지 더 첨부하자면, 김유신과 관련된 유적지와 행사가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 강릉단오제에서 김유신은 대관령 산신으로 여겨진다. 경주 황성 공원과 서울 중구 백범광장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처럼 많이 접하게 되는 위인이기에 김유신에 대한 논쟁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김유신의 평가도 시대와 상황이 바뀔 때마다 계속 바뀌었다. 이는 역사가 살아있는 학문이기에 당연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다른 의견을 보지 않으면 역사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시적 관점이 아닌 김유신이라는 한 인물이 신분제라는 제약을 넘어 큰 업적을 세우는 과정은 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유신이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몰락하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였던 구해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끝까지 저항하며 가야를 지키려 했던 대가야와는 달리 구해왕은 금관가야를 신라에 갖다 바쳤다. 전쟁을 피해 수많은 백성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당시 가야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하늘이 선택했다는 정통성을 가지고 5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던 금관가야의 마지막이라고는 너무도 허망한 일이었다.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며 신라에 투항한 구해왕의 자손들은 신라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어느 나라보다도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를 운영하던 신라에서 망국의 자손들은 중앙에서 점차 밀려났다. 구해왕의 아들이었던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1위 관등인 각간에 있었지만, 몰락을 막아내진 못했다. 신라 왕족들은 구해왕의 자손들과 결혼하는 것을 꺼렸다.
 

백범광장 김유신 동상


구해왕의 자손과 결혼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이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김무력의 아들인 김서현은 신라 왕족과 결혼할 수 없었다. 김서현은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국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흥왕의 아우였던 숙흘종의 딸 만명부인을 꾀어 충북 진천으로 도망간 것이었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렇게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인물이라는 여러 전설이 후대에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신분적 한계에 부딪힌 아이에 불과했다. 김유신이 15살에 화랑이 되어 여러 낭도를 이끌었지만, 금관가야 왕족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지방 출신의 화랑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석굴에서 수련하던 중 난승이라는 노인을 만나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 받았다는 전설, 기생집으로 자신을 인도했던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는 이야기들은 김유신이 신분제와 지방 출신이라는 한계를 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펼쳤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김유신이 장수로서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아주 늦은 시기였다. 629년 김유신이 33살이 되던 해에 패배가 짙던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단신으로 적군에 뛰어들어 적군 장수의 목을 베면서부터다.
 

진천 길상사


김유신은 이후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중앙으로의 진입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김춘추 집안과의 혼인이었다. 김춘추는 폐위되었던 진지왕의 손자였지만, 선덕여왕이 후사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음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누이와 정분을 나누게 했다. 김춘추도 야망이 큰 인물이었기에 자신을 옭아맬 수 있는 김유신의 집안과의 결혼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정치적 술수가 뛰어났던 김유신은 자식을 낳지 못하던 선덕여왕을 이용했다. 아이를 가졌으나 오히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을 묵도할 수 없었던 선덕여왕을 제대로 파악했기에 가능했다.
 
선덕여왕의 신임을 얻고 김춘추와 혼인 관계를 맺었지만,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선덕여왕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왕위가 위태로웠고, 김춘추도 왕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비담이 선덕여왕을 비판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수많은 진골 귀족이 비담 측에 동조하면서 선덕여왕 편에 섰던 김유신은 위기에 빠졌다. 특히 비담이 떨어지는 별을 보고 선덕여왕이 죽었다는 여론전에 패배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등에 불을 붙여 하늘에 띄운 뒤 선덕여왕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며 여론을 뒤집고 승리했다.

백범광장 김유신


그 뒤 군권을 장악한 김유신은 김춘추를 무열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정벌 때에는 고령으로 선봉에 설 수 없었지만, 경주에 남아 문무왕이 마음껏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그 이후로도 백제·고구려 부흥 운동과 당나라와의 전투에 많은 조언을 하며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했다.
 
여기에 당의 압력에 강하게 맞섰고, 회유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백제 정벌 시 당나라 소정방이 계백과의 전투로 합류가 늦은 신라에게 책임을 물으며 장수 김문영을 참수하려 했다. 이에 김유신은 당군을 먼저 치고 난 뒤, 백제를 공격하겠다며 강하게 나가며, 당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백제 멸망 후에는 김유신에게 벼슬과 식읍을 제공하여 회유시킨 뒤, 신라를 분열시키려 했다. 김유신이 이에 응하지 않자 맏아들인 김삼광을 당 관리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불러들인 뒤 볼모로 삼았다.

그러나 김유신은 신라를 배반하지 않았다. 선덕여왕과 무열왕 그리고 문무왕에 이르기까지 김유신은 충직한 관료로 왕들을 보필했다. 후대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봉하고, 김유신의 후손을 왕손으로 예우했다. 그 이유는 김유신은 그 누구보다 충직한 신하이자 관료로 만대에 걸쳐 모범이 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더불어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사회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오늘은 개인적인 역량과 노력으로 신분제를 넘어선 김유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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