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1397~1450)을 꼽는다. 세종이 시련을 이겨낸 과정과 업적이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왕이 될 위치에 있지 않았다. 태종은 안정적인 정국운영을 위해 10살이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며 일찌감치 후계자 문제를 마무리했다. 이는 건국 초기 왕자의 난으로 많은 왕족이 희생되던 상황에서 어린 세종이 안정적인 삶을 살 기회이기도 했다.
세종은 어린 시절 아무 걱정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익히는데 몰두했다. 책 읽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건강이 상할 것을 우려한 태종이 책을 모두 압수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세종은 <구소구간>을 병풍에 숨겨놓고 천 번 이상을 읽을 정도로 뚝심을 보였다. 이런 모습은 훗날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양녕대군이 정종과 곽정의 첩 등을 만나는 등 세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계속하자, 태종은 1418년 6월 세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양녕대군을 지지하는 신료들이 많은 상황에서, 둘째 효령대군을 건너뛰는 파격적인 발표는 세종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많은 신료의 반대에도 태종은 강력한 왕권으로 그해 8월 세종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는 태종 자신이 상왕에 올라 세종의 왕권을 지켜주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이는 세종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군권을 가진 태종 아래서 장인 심온이 처형되는 것을 막지 못하던 모습은 남편으로서, 군주로서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즉위 초 세종이 군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세종은 태종에게 맞서기보다는 자신이 실질적인 왕으로서 정국운영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와 함께 자신을 지지하면서 정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유능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을 만들었다. 훗날 집현전에서 배출된 관료들은 세종이 안정적으로 국정운영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세종은 중국 명나라가 요구하던 사대관계라는 국제질서를 현실적으로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사대관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자주국으로서 조선이 존재하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다. 명나라보다 약소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주적인 조선을 만들기 위해 힘을 기르고 조선만의 문화를 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재위 기간 동안 한순간도 빠짐없이 여러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세종의 업적을 분야별로 크게 나누어보면 불교개혁, 농업진흥, 조세개혁, 국방력 강화, 천문 그리고 한글 창제다. 불교개혁의 경우 고려를 백성들의 기억에서 지우면서 조세확보라는 두 가지 효과를 얻기 위해 진행되었다. 고려는 불교를 국가운영의 근본 틀로 삼고,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고려 말에는 수많은 사찰이 세워지고, 넓은 농토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권문세족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세종 시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찰이 종파에 따라 독자적으로 운영되었고, 사찰을 찾는 백성들은 자연스레 고려를 떠올렸다. 그렇기에 불교 교단이 조선에 귀속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교종과 선종으로 통합하고, 각 종단에 18개의 사찰 총 36개의 사찰만을 인정하였다. 여기에 사찰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했다. 이는 유생들에게는 조선이 불교가 아닌 유교를 국가운영의 틀로 삼았음을 재확인시켜주며 지배계층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세종에게 있어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농업진흥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고려말 수많은 외침으로 농토가 황폐화되어 백성들은 곤궁한 삶을 살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하고 정국이 안정되어도 낮은 토지 생산력이 늘 문제였다. 세종은 중국의 선진농법을 가져다 활용하려 했지만, 풍토와 기후가 달라 효과가 매우 적었다. 중국 농서를 활용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파악한 세종은 지역마다 뛰어난 농사기술을 가진 농부들의 경험을 수집하고, 확인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보급하였다. 이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풍토에 따라 전국적으로 생산량이 고르게 않았다. 또한 풍흉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세금을 걷다 보니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적었다. 그래서 세종은 토지조사를 20년마다 하여 토지 비옥도에 따라 세금을 달리 내는 전분 6등법, 그해의 풍흉을 고려하는 연분 9등법으로 세제를 바꾸었다. 그 결과 토지 생산력이 크게 늘어났고,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국가 재정이 확충되자 국방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조선의 경제가 튼실해질수록 명이 조공을 늘리고, 여진과 왜가 노략질할 가능성이 커졌다. 세종은 우선 명에게 금과 은으로 조공을 바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호소하며, 마와 포로 대체시켰다. 이로써 백성들의 노고를 줄이며 국방에 필요한 광물자원을 확보했다. 세종 말년에는 최무선이 화약으로 왜구를 크게 섬멸했던 역사를 떠올리며 신기전을 완성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4군 6진을 개척하여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정 짓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주변국을 강하게 압박하던 홍무제가 죽으면서 명의 대외정책이 변화되었음을 인지하고, 여진족만 토벌할 것을 설득시킨 것이 유효했다. 왜의 경우에도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왜의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 언제든 노략질을 할 것으로 판단하고, 계혜조약을 통해 1년에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을 허용했다. 이로써 왜는 임진왜란 전까지 침략을 자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세종은 비록 겉으로 명나라의 사대질서에 응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명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된 나라를 운영하고 싶었다. 이는 백성을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우선 농사 시기를 맞추기 위해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백성에게 국가 정책이나 유교 윤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어려운 한자가 아닌 쉽게 익힐 수 있는 우리만의 문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천문관측이나 문자제작은 명의 지배질서를 벗어나겠다는 의미로 비추어져 자칫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천문관측과 문자제작의 경우 필요한 기술과 인력이 없다는 사실이 세종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장영실을 비롯한 여러 장인과 집현전을 통해 양성된 학자들이 부족한 기술과 지식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사대질서를 외치는 유생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한글의 경우만 해도 1443년 창제했지만, 유생의 반대에 부딪히며 3년 뒤인 1446년이 되어서야 반포되었다. 하지만 힘을 바탕으로 한 강압이 아닌 토론을 통한 협치였기에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왕은 모든 일을 결정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좋은 결과를 가져와도 칭송보다는 당연한 일로 치부되고,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을 때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세종이 했던 수많은 정책은 그 당시 파격적이고 위험한 정책들이 많았다. 기존에 해왔던 편안한 방식으로 국정 운영하기 바랐던 많은 관료에게 있어 세종은 골칫덩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세종은 그 어떤 왕보다도 훌륭한 성군으로 기억된다. 그래서일까? 세종 같은 성군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