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굉장히 혼란했던 시기다. 단순히 나라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방위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의 중심에는 성리학이 있었고, 성리학은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외적으로 고려말은 원나라가 몰락하고 중국인(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동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자국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를 통솔하기 위해 사대주의를 강조하는 성리학을 내세웠다. 대내적으로도 권문세족과 불교의 불법 비리를 규탄하고 올바른 국정운영을 하는데 있어서도 도덕을 강조하는 성리학은 유효했다. 특히 신진사대부가 권력을 잡는 데 있어 성리학은 명분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제시해주었다. 그런데 성리학이 기존의 유학과는 달리 철학적이라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문제를 고려에 맞게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해 조선의 운영토대를 마련한 인물이 정몽주(1337~1392)다.
정몽주는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정몽주는 어머니가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태어나서 어린 시절 몽란(夢蘭)이라 불렸다. 몽란으로 불리며 자라던 정몽주가 9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검은 용이 배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잠에서 깨니, 배나무에 정몽주가 있었다. 정몽주가 하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아이로 생각한 부모는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꾸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몽주’는 성인이 된 이후에 사용한 이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기대를 받았던 정몽주는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이색은 정몽주를 “학문에서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평가했다. 이를 보면 정몽주는 머리가 좋은 것을 떠나, 학문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타고난 재능을 더욱 발전시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자치하며 관료로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여기에 공민왕이라는 개혁 군주도 한몫했다. 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리학을 사회개혁의 이념으로 삼았던 공민왕에게 성리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갖춘 정몽주는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정몽주는 행정업무만이 아니라 외교와 군대의 운영에도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참여했으며, 1372~1373년에는 대명 사행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의 수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친원 정책을 펴는 이인임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족으로 인해 정몽주는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 원보다 명나라의 힘이 더 강하다는 현실적 상황을 제시하며,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고려가 가야 할 바를 주장하는 정몽주에게 되돌아온 것은 2년간의 유배였다.
언양에서 유배 생활을 마친 정몽주는 권문세족의 감시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들을 묵묵히 해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그럴수록 권문세족들은 정몽주를 사지로 계속 보냈다. 자신들이 정몽주를 죽였을 경우 가져올 비판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말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정몽주가 사신단으로 1377년 왜를 방문한 것이다. 고려말은 왜구의 끊임없는 노략질로 많은 고려인이 죽고 일본으로 끌려가던 시절이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왜구를 토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를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고려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정몽주는 권문세족이 자신을 일부러 사지인 왜로 가는 사신단에 넣었음을 알고도 괘의치 않았다. 당당히 왜로 넘어간 정몽주는 노략질하는 해적 단속을 주문하고, 강제로 끌려갔던 수백 명의 고려인을 데리고 귀국했다. 실로 대단한 외교적 성과였다.
이런 외교적 성과가 한 번이라면 운이 좋다거나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외교사절로 여러 차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384년은 명나라 홍무제가 고려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하고, 고려 사절단을 억류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해였다. 이때에도 정몽주는 명의 수도 남경까지 90일이 걸리는 거리임에도, 60일 정도밖에 안 남은 시점에서 권문세족에게 등 떠밀려 홍무제 생일을 축하하러 떠났다. 명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남경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어려운 일임에도 정몽주는 명나라 홍무제에게 밀린 조공을 면제받고 유배된 사신단을 데리고 왔다. 홍무제는 자신의 뜻과 어긋나면 수십만 명도 죽일 만큼 폭군의 기질이 있어, 정몽주의 외교활동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고려 내에서 정몽주는 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쉽게 건들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정몽주와 뜻을 함께한 인물이 이성계였다. 1380년 이성계의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황산대첩)하면서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했다. 국내적 현황과 국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둘의 방향이 같았기에, 정몽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다. 1389년에는 흥국사에서 이성계, 정도전 등과 공양왕의 옹립을 논의하고 시행한 공로로 정몽주는 9공신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이성계와 정몽주는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다. 고려를 유지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를 바랐던 정몽주와는 달리 이성계를 중심으로 급진 신진사대부들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 했다. 1390년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명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 사건이 이성계와 정몽주를 갈라놓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명군을 요청했음에도 정몽주는 “윤이와 이초의 죄가 명백하지 않다.”라며 이성계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정몽주를 두둔했다. 오랜 세월 정몽주와 함께하며 쌓았던 정이었는지, 정몽주의 훌륭한 성품과 인품인지, 아니라면 정몽주를 지지하는 공양왕과 고려를 지지하는 백성이 두려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방원이 정몽주 제거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이성계는 허락지 않았다. 어찌 보면 정몽주가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무리수를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몽주도 동원할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급진파를 제거할 힘이 없었다. 그러던 중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쳤다. 이를 기회로 여긴 정몽주는 이성계의 주축 세력인 정도전과 조준 등을 유배 보내며 고려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폈다. 이런 사이 모친상을 당하고 여막살이를 하던 이방원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돌아와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하였다.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정몽주는 괘의치 않고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를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이때 이방원은 정몽주를 찾아가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각을 살폈다. <단심가>를 들은 이방원은 정몽주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조영규를 보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 이로써 고려를 지탱할 정몽주라는 재목이 사라졌고, 3개월 뒤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된다.
정몽주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성계를 왜 찾아갔는지, 이방원이 정말 독자적으로 정몽주를 제거했는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죽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며, 후대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다.
<단심가> -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