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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22. 2020

위인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에 김구(1876~1949)는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김구 없이 근현대사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안두희가 쏜 탄환에 돌아가셨을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백범일지>가 남아 김구의 삶과 업적 그리고 그가 들려주고자 했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구의 생애를 짧은 글에 모두 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김구라는 인물이 존재할 수 있게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김구의 집안은 효종 때 김자점이 반역죄로 처벌되는 과정에서 황해도 해주로 도망쳐 와 자리를 잡았다. 반역자 집안이었기에 후손들은 양반 가문임을 내세우지 못하고 군역전을 경작하며 상민의 삶을 살았다. 그래도 양반 가문이라는 자부심을 모두 놓지 않았다.



김구의 아버지인 김순영은 가난으로 24살이 되어야 14살의 곽낙원과 결혼했다. 결혼하고 3년 뒤 곽낙원은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는 태몽을 꾸며 김구를 잉태했다. 그러나 출산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아이가 나오지 않아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아버지 김순영은 소 길마(짐을 얹기 위해 소 등에 씌운 안장)를 머리에 쓰고 지붕 용마루에 올라가 소 울음소리를 냈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김구다.
 
아이를 간수할 기력도 없는 곽낙원을 대신해 아버지 김순영은 마을을 돌며 젖동냥을 했다. 지금이야 남자들이 아내에게 사랑하는 표현을 하고, 집안일을 하는 일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자가 젖동냥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갓 난 김구에게 있어 소 울음소리를 내고 젖을 동냥하며 몸소 사랑을 보여준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큰 복이었다.

힘들게 태어난 김구는 네 살 무렵 천연두에 걸려 또다시 생사를 넘나들었다. 당시 천연두는 돈이 있어도 치료가 어려워 생사를 운에 맡겨야 할 정도로 큰 병이었다. 더욱이 가난했던 김구의 집안은 아이에게 약을 지어 먹일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 곽낙원은 김구의 얼굴과 몸에 난 종기를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짜내며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웠다.




이토록 어렵게 살아남은 김구는 어려서 고집도 세고 독단적인 행동을 보였다. 다섯 살 때는 이웃 동네 애들에게 매질을 당하고는 그들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집 밖을 나서기도 했다. 다행히 17, 8세 되는 처녀에게 발견되면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숟가락을 분질러 엿을 바꿔 먹었고, 아버지가 이부자리에 숨겨놓은 엽전 스무 냥을 훔쳐 떡을 사 먹으려 했다.
 
아버지 김순영은 엿을 먹었을 땐 타일렀지만, 돈을 훔쳤을 때는 들보에 김구를 매달아 놓고 매를 쳤다. 마침 재종조부가 이 광경을 보고, 아버지를 때리며 김구를 감싸주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장난과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김구는 부모님과 친지들의 사랑 덕분에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가난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상민을 천대하며 무시하던 양반 토호들도 이런 김순영을 경계하여 도존위(면 단위 실무를 맡아보는 자리)에 천거하며 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순영은 세상이 알아주는 효자였다. 김순영은 어머니가 위독하자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입에 피를 흘러 넣으며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였다.


김순영은 자식 사랑도 커서 김구가 글공부를 배우겠다고 하자, 양반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훈장 선생을 초빙하여 서당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김순영이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프게 되면서 김구는 공부를 중단하고 사촌들과 농사를 지어야 했다. 아들이 꿈을 잃고 풀 죽어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던 김순영은 본인의 몸이 회복되자마자 바로 김구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어머니 곽낙원(1859~1939)은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했지만, 강인하면서도 올바른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 김구를 어렵게 낳고 키웠다. 그렇게 키운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 쓰치다를 죽이고 잡혀갈 때, 세상이 무너진 듯했다. 잡혀가는 김구에게 함께 죽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의 의연한 말에 마음을 다잡고 남편과 함께 형무소가 있는 인천으로 내려가 자식 뒷바라지를 했다. 이 당시 김구가 사형선고를 당하자 “과연 내 아들이다. 평안감사가 된 것보다 기쁘다.”라고 한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김구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취임하자 어머니 곽낙원도 상해로 건너갔다. 그러나 김구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최준례가 죽자, 어쩔 수 없이 두 손자(인과 신)를 키우기 위해 안악으로 돌아왔다. 곽낙원은 없는 살림에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돈을 아끼고 아껴 독립 자금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 심해졌다. 결국 손자들과 중국 상해로 망명을 계획했으나, 이마저도 일제의 방해로 용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곽낙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집을 수리하며 일제를 안심시킨 후 탈출하는 기지를 보였다.



 이처럼 어렵게 상해로 넘어간 곽낙원은 9년 만에 만나는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데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라며 가족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지장이 있을까를 경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남경에 있을 때 요원들이 곽낙원의 생신상을 차리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곽낙원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라며 받은 돈에 자신의 쌈짓돈을 합쳐 권총을 구매했다. 그리고 이 총을 청년들에게 건네주며 일본놈을 죽이는 데 써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김구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은 위대한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진정 우리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을 일관된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진실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김순영과 곽낙원 두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김구의 삶은 그의 아들과 자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김구의 큰아들 김인(1917~1945)은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 둘째 아들 김신(1922~2016)은 6·25 전쟁 당시 공군으로 큰 활약을 펼쳤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국군참모총장으로 대한민국의 공군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 뒤의 후손들도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김구 가문이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는 기억하고 본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돈과 권력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모습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선조의 위대함을 인식하고 그 뜻을 계승하는 모습을 부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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