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정문을 바라보았을 때 우측으로 남산공원길이 있다.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외솔 최현배 기념비’가 있다. 하지만, 남산공원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라면 ‘외솔 최현배 기념비’를 찾거나 만나기가 쉽지 않다. 기념비가 동국대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지만, 바로 눈에 띄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남산공원길을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누구의 기념비인지 모를 것이다.
최현배(1894~1970) 선생은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분이며, 늘 우리가 감사해야 할 분이다. 바로 한글을 지키고, 체계화시키고, 발전하는데 평생을 바친 학자이며 교육자이고 독립운동가이시다. 무엇보다 우리가 한글을 아무 불편함 없이 사용하도록 많은 것을 만든 분이다. 지금은 한글 사용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최현배 선생이 흘린 땀방울과 노고는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 예로 우리가 가로쓰기하는 것도 최현배 선생이 이루어놓은 결과물이다. 과거 우리 선조는 글을 쓸 때 세로로 늘 써왔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세로쓰기가 고정화되면서, 어느 누구도 한글을 가로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글이란 세로로 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주시경 선생의 가로쓰기 주장에 동조하며 세로쓰기보다 가로쓰기가 훨씬 더 많은 이점을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광복 이후 교과서편찬분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교과서를 가로쓰기로 만들도록 토대를 잡았으며, 오랜 시간 신문사와 출판사에 가로쓰기로 인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지금 모든 매체는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다.
요즘 세로쓰기로 된 인쇄물을 보면 나이가 있는 분들은 향수에 젖을 것이고, 젊은 사람들은 생소해한다. 오늘날의 이런 모습은 최현배 선생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세로쓰기로 된 신문이나 책을 읽었을 때, 한눈에 내용이 들어오지 않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세로쓰기가 낯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세로쓰기가 가로쓰기보다 가독성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최현배 선생은 타자기 자판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로쓰기를 사용하던 시절 인쇄하기 위해서는 가로로 글자를 찍은 뒤, 종이를 90도 왼쪽으로 돌려 세로로 읽어야 했다. 인쇄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등 불편함이 가득했다. 이런 가운데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가 한글학자 이극로를 만나면서 한글을 과학화하기 위해 세벌식 타자기를 만들었다. 최현배는 공병우 타자기를 보급하기 위해 “한글 타자기 경연대회”를 열어 한글 타자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한글 타자기에 대한 무관심에 힘들어하던 공병우 박사는 최현배 선생의 한글 사랑과 한글 기계화 사업 지원에 용기를 가지고 한글 타자기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병우 박사는 타자기 제작에 멈추지 않고 “한글 기계화 연구소”설립을 후원했다. 비록 1968년, 1983년 두 번에 걸쳐 세벌식 타자기가 표준 글자판 규격에 탈락했지만, 한글의 기계화에 모든 것을 바친 공병우 박사 덕분에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프로그램인 “아래아한글”이 나올 수 있었다. 최현배 선생의 한글 사랑과 타자기 보급을 위한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자판은 보지 못했거나, 훨씬 늦게 나왔을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한글 용어들이 최현배 선생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급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어를 배우면서 우리의 아름다운 단어는 많이 사라지고, 일본어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최현배 선생은 “언어라는 것은 정신적 산물이다. 민족의 정신생활은 그 특유의 언어를 낳고, 그 언어는 그 민족의 정신을 도야하며, 민족감을 공고히 결합하는 것이다.”라며 바른 언어를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어 벤또를 도시락으로, 후미끼리를 건널목 등으로 바꾸었으며, 짝수‧홀수‧덧셈‧뺄셈과 같은 단어를 만들어냈다. 꽃잎을 화판, 암술을 자예, 수술을 웅예라고 광복 이전 용어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면, 최현배 선생의 업적이 더욱 대단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말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사실도 새삼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의 정신이 깃들어있고, 아름다운 한글을 지키고 보급한 최현배 선생은 울산에서 태어났다. 1910년 서울로 상경하여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한 최현배 선생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주시경 선생을 만나게 된다. 주시경 선생에게 한글을 배운 최현배 선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늘날 초등학생에 해당하는 소학생들이 한글을 익힐 수 있는 <국어독본>을 제작했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현배 선생은 더욱 체계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다녀왔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최현배 선생은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어 문법을 연구하고 정리한 <우리말본>을 1937년 출판하였다. 최현배 선생은 한글 연구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조선어연구회 회원이 되어 <한글> 지 창간과 ‘한글날’ 제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9년에는 조선어 사전편찬회의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글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최현배 선생을 일제가 가만두지 않았다. 1938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이승만과 연계된 YMCA 총무 신흥우가 만든 항일민족주의운동 단체였던 흥업구락부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최현배 선생을 구속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은 한글 보급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저서 <한글갈>을 출간했다.
1942년 최현배 선생이 소속된 조선어학회는 민족운동을 하는 단체로 치안유지법을 어겼다며 일제에 의해 수사를 받았다. 최현배 선생 외 15명이 기소 처분되고 12명이 기소 유예된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일제의 고문과 열악한 환경으로 이윤재와 한징이 옥에서 돌아가실 정도로 탄압을 받았다. 최현배 선생도 1945년 8월 18일 사형집행을 앞두고 있었다.
다행히 광복되면서 8월 17일 석방된 최현배 선생은 서울로 돌아와 하루도 쉬지 않고 조선어학회 재건에 힘썼다. 광복된 조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한글 보급이라고 생각한 선생은 문교부 편수국장을 두 차례 재직하면서 가로쓰기, 한글 교과서 제작, 교사 양성이라는 업적을 세웠다. 선생 덕분에 많은 국어학자가 배출되었고, 한글은 보다 체계화되고 발전하였다. 그 결과 동티모르가 한글을 문자로 채택되고, 세계인들이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다.
하지만 한글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업신여기는 요즘 세태에 최현배 기념비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많은 분이 목숨 걸고 우리의 한글을 지켜왔는데, 후손인 우리가 이토록 한글을 무시하고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지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언어는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생물로 매 순간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지고 소멸한다. 그리고 사회를 반영하거나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최현배 선생은 한글을 통해 우리가 올바른 정신을 함양하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셨다. <조선 민족 갱생의 도>에서 최현배 선생은 우리 민족의 잘못으로 “의지박약, 용기 부족, 활동 결핍, 신념 부족, 자존심 부족, 도덕심 타락” 등 10가지를 꼽았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흥성한 나라를 만드는데 “왕성한 생기, 군사적 우수성, 창조적 문화 이용, 조직력‧정치력 센 겨레, 일치 단결력, 부지런함, 도덕심” 등 9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최현배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겠지만, 최현배 선생을 한글에만 국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한글을 통해 아름답고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했던 선생의 뜻과 업적을 되새기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