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려운 나라가 위기에 봉착하면 수많은 위인들이 등장한다. 자신이 가진 모두를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면서도, 자신에게 책임을 돌려 나라의 위기를 막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런 수많은 위인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로 이준(1859~1907) 열사가 있다. 그래서일까?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일을 막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다가 머나먼 타국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의 업적은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준은 함경도 북청에서 알아주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되었으나, 다행히도 할아버지와 숙부가 돌봐주면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오히려 이준은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부모가 없음에도 반듯하게 자라면서, 집안의 큰 기대를 받았다. 비단 이준의 능력과 재주 그리고 성품을 집안에서만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 최익현 선생은 서울로 상경한 18살의 이준을 만나고는 재주와 굳건한 심성에 크게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부정·비리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을 비롯하여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던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 시대 내내 차별받던 함경도 출신의 이준이 조정에 들어가 나랏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준은 25살이 되던 1884년 함경도 시에서 장원급제하고, 1887년 초시에 합격했으나, 그에게 주어진 일은 종9품 최말단직인 순릉참봉이었다. 그것도 그의 나이 35살인 1894년이었다. 하지만 이준이 그 나이까지 벼슬을 기다리며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었다. 가재를 털어 북청에 경학원을 세워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교육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이준은 참봉이라는 낮은 관직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직면하고, 1895년 3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했다. 법관양성소는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근대적 사법제도를 운영할 법관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으로 조선이 새로운 사회로 발돋움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기관이었다. 이곳에서 공부를 마친 이준은 1회 졸업생으로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으나, 비리를 저지른 고관 대신을 탄핵한 일로 한 달여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 일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 이준은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여 졸업한 그는 1898년 나라를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싶다는 심정으로 귀국했다.
마침 1898년은 미국에 건너갔던 서재필이 조선으로 돌아와, 많은 애국지사와 독립협회를 만들던 때였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국내를 넘어 세계정세를 접한 이준은 서재필과 뜻을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독립협회 평의원이 된 이준은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행에 참여하는 등 조선이 자주적인 나라가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만민공동회에서 열변을 토했던 이준의 연설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한 보수세력과 고종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과정에서 이준신도 투옥되면서 개혁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준의 마음에는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지식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준은 1902년 이상재, 민영환, 이상설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 운동을 벌였다. 특히 이준은 러시아가 동청철도(하얼빈 철도의 옛 이름)를 건설하면서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을 맺자 큰 위기라고 여겼다. 이준으로서는 영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는 영‧일동맹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개혁당의 일원으로 독립회관에서 국민을 대상으로 영일동맹을 비판하는 연설을 통해 심각성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이준의 노력이 국민에게 조선의 위기를 알리는 데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나, 국제사회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여전히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904년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러일전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은 강제적으로 제1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을 군사기지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50년 동안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위임하라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준은 황무지개척권을 통해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탈하는 일본을 막기 위해 이상설, 송수만 등과 보안회를 조직했다. 총무를 맡은 이준이 반대 상소와 시위 운동을 주도하며 황무지개척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보안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보안회가 하던 일을 계승하는 대한협동회를 만들어 이상설을 회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대한협동회에 이상재, 이승만, 이동휘, 양기탁 등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과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황무지개척권을 반대하자, 일본은 결국 황무지개척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황무지개척권 포기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수많은 정책 중 하나만을 저지시켰을 뿐이었다. 더 강력하고 무자비한 일본의 침략은 계속되면서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본의 침략행위 중에서도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친일 분자를 육성하여 우리를 하나로 단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 일에 가장 앞장선 국내 단체가 송병준을 필두로 하는 일진회였다. 러일전쟁 중 일본군을 위해 함경도에서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하는 등 매국 행위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이준은 1904년 보부상이던 윤효정, 나유석 등이 세운 공진회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준은 민영환과 힘을 합쳐 공진회를 일반 정당으로 전환시킨 후 <정부의 명령은 법률과 규칙이 정한 범위 내에서 복종할 것, 인민의 권리는 법률 내에서 자유로이 신장할 것> 등을 담은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더불어 연설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의식을 깨우치며, 일진회의 이용태, 김가진 등에게 탈퇴를 종용하는 공개장을 보냈다. 그러나 친일파가 정권을 잡고 있던 조선 정부는 공진회를 위험 단체로 간주하여, 이준과 윤효정 등 집행부를 구속하였다.
이에 공진회 회원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고, 경찰과 감옥 업무를 담당하던 경무사를 찾아가 이준을 비롯한 집행부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 이준의 부인이던 이일정이 소속된 여성 단체도 규탄에 참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일본 기마 헌병대의 강제 해산뿐이었다. 결국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준은 황주의 철도(鐵島)로 3년 형의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준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더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여기며 새로운 일을 계획하였다. 다행히도 민영환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풀려난 이준은 1905년 윤효정과 양한문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국민의 정치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입헌정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앞장섰다. 이와 함께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며 부정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주권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