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되면서 세계의 모든 나라와 조약을 맺을 수 없게 된 조선은 더 이상 국제사회의 일원이 아니었다. 외국과의 조약 등 모든 외교 업무를 일본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만큼, 조선은 자주국이 아닌 식민국가로 전락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다 이준과 뜻을 같이했던 민영환이 을사늑약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자결했다는 소식은 이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준은 민영환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의 비통함과 절망감을 해소하기 위해 상동교회에서 이동녕, 전덕기 등과 을사늑약 폐기 상소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우선 이준 스스로 상소문을 작성한 뒤, 을사늑약에 분개하는 시민들과 함께 고종이 있는 덕수궁 대한문과 서울 시내에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진압하려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일 정도로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나, 을사늑약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힘이었다.
이준은 을사늑약을 바로 잡을 힘이 조선에 없음을 파악하고, 훗날을 대비하기 위해 교육진흥과 경제살리기에 힘을 쏟았다. 1906년 유성준·전덕기 등과 국민교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서 서울에 중등교육 기관인 보광학교를 설립했다. 보광학교는 18~35세의 청년들에게만 입학시켜, 빠른 시간 내에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로 양성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또한 유진호 등과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역의 사립학교에 재정을 지원하면서 교과과정 등을 지도하는 등 구국운동과 계몽 강연 등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에 진 채무를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이준은 국채 보상 연합회의소 소장이 되어 서울에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외에도 대한자강회와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앞일을 대비하던 이준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준은 만국평화회의가 일제의 침략행위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이회영과 전덕기 등의 도움으로 고종을 만난 이준은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떠나 부산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정사 이상설을 만났다. 둘은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을 만났다.
이들 셋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제사회의 일본의 침략을 알려, 쓰러진 국운을 바로 세우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다. 그러나 6월 25일 도착한 헤이그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온도 차가 너무 심하게 났다.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러시아는 입장을 바꾸어 일본 편을 들었다. 러시아 대표이며 의장이던 넬리도프 백작은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특사단을 만나주지 않았다. 부의장이던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도 헤이그 특사와의 만남을 거절했고,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는 평화회의에 특사단의 참석이 불가함을 알려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평화회의를 취재하고자 모여든 세계 언론인들이 특사단에 관심을 보이면서, <평화회의보>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게재하고, 협회 회합에서 이위종이 불어로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국과 일본은 연설을 계기로 특사단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그 결과 이준을 비롯한 특사단의 활동폭이 좁아지면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준은 조선에서 머나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갑작스럽게 순국하고 말았다.
4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은 이준의 죽음을 두고 ‘할복자살을 했다.’, ‘종기가 악화하여 죽었다.’ 등 여러 추측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준이 할복자살했다는 근거로 제시된 1908년 대한매일신보의 기사가 민족의 공분을 끌어내기 위한 허구였음이 1956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던 양기탁이 신채호와 베델과 협의하여 이준의 죽음을 할복자살로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도 할복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이 죽은 이유를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준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작은 불씨를 잡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다가 순국했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의 에이켄무이넬에 매장된 이준의 유해는 순국 55년만인 1963년 10월 4일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반세기 전 나라를 지키고자 머나먼 타국에서 순국한 이준을 기억하던 정부와 국민은 국민장으로서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이준의 유해를 안장해놓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장충단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여, 많은 사람이 이준의 뜻과 노력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1972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 묘소에도 이준 열사의 흉상과 기념비를 건립되는 뜻깊은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준 열사의 애국 활동이 후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교육과 경제진흥을 위한 노력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기쁜 것은 이준 열사의 유해가 고국으로 모셔졌고, 많은 이들이 이준 열사의 뜻을 기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우리가 누구나 아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조차도 찾아오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준 열사의 유해가 돌아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친일파를 밝히고 처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가와 그의 후손들을 국가가 인정하고 보호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지금 당장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모셔와 기려야 한다. 이는 역사를 바로잡는 첫 번째 단추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천년만년 유지하는 첫 번째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