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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28. 2021

식민수탈기관을 파괴하라.


학창 시절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나석주를 역사 시간에 배웠다. 의거 활동을 벌인 훌륭한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지만, 나를 포함한 학생 대부분이 시험문제를 맞추기 위해 이름만 암기했다. 시험에서 의거 활동과 독립운동가를 올바르게 연결하는 문제를 맞히기 위해 나석주란 이름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연결하여 외웠다. 학창 시절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나석주의 ‘나’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동’ 앞 글자만 따서 ‘나도~옹 폭탄을 던져야지.’라며 단순 암기하였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교사가 된 지금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실로 부끄러운 순간이다. 역사를 배우는 의미도 모른 채, 한 문제라도 더 맞추기 위해 무작정 외우기만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렇게 암기했기에 잊혀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라도 기억하게 되었다고 위안 삼는다. 또한 현재는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주어진 학습 시간을 고려했을 때, 나석주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 짧은 수업 시간에 모든 역사적 사건을 학생들이 알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학생들이 훗날 나석주라는 이름을 듣거나 동상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 그분의 독립운동을 되새겨볼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둔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풍족하지 않은 경제적 형편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나석주는 1891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자로 태어난 만큼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 장가를 갔고,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어린데다가 어려운 형편에서 가정을 이룬 만큼 나석주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도 버거울 텐데, 그는 16살이 되던 해에 보명학교에 입학하여 학문을 익혔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에 보명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던 나석주는 인근 안악(安岳)에 있던 양산학교를 찾아가 수학했다. 이때 나석주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백범 김구다. 사제지간으로 연을 맺은 시간은 짧았지만, 누구보다 우리나라를 사랑했던 김구를 스승을 둔 나석주는 애국심이 크게 함양되었다. 그리고 김구처럼 어떤 위치와 자리에 있든 자신이 조국의 독립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느 것 하나 마다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처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나석주에게 경술국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나설 때였다. 마침 서울 협성학교에서 내려온 임재남과 7살 형이던 최세욱과 의기를 투합한 나석주는 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권총을 구입했다. 그러나 함께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던 이충건이 사라지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석주는 총독암살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포기하지 않고 11명과 함께 중국 청도로 넘어가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나석주는 일행과 독립자금 1,200원을 가지고 황해도 장연 대진포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는 배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부호 등을 협박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했다는 죄명으로 장연경찰서에 체포되고 만다. 이로 인해 4개월의 옥고를 치르지만, 나석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1914년 독립군이 되고자 가족들을 데리고 북간도 모아산으로 이주했다.


북간도에는 이동휘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동림무관학교가 있었다. 나석주는 독립군으로서의 역량을 갖추기 위해 동림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이 깊어졌다는 소식에 1916년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다고 독립을 향한 나석주의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나석주는 누구보다 먼저 만세운동을 펼쳤다. 일제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들어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다가 발각되어 도망 다니던 나석주는 대한독립단에 합류하게 된다. 대한독립단의 일원이 된 나석주는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고, 은률군수 최병혁을 사살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국내에서 단원 모집과 군수품 모집 그리고 의열투쟁을 지도하기 위해 만든 군사주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군사주비단의 일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는데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친일파를 육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그 여파로 군사주비단에 소속되어 있던 인물들이 배반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석주는 함께 활동하던 최세욱과 최호준이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자, 군사주비단원으로 민족을 배반한 이수영과 오의제 그리고 김학범을 동료들과 함께 찾아가 사살했다. 밀정 사살 후에도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나석주였지만, 국내에서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1921년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나석주는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당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며 분열되던 시점이었다. 나석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35세 이하의 청년들로 구성된 유호청년임시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를 통해 나석주를 비롯한 청년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쇄신안을 제출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수용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석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석주는 국민의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절대로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석주는 김구가 조직한 한국노병회에 가입했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 명 이상의 군인을 양성하여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김구가 운영하던 단체였다. 나석주는 한국노병회의 특별회원으로 나라를 되찾을 군인이 되기 위해 1922년 중국 군벌 중 하나였던 직례파가 운영하던 한단군사강습소로 13명의 동료와 함께 떠났다. 이곳에서 1년여 동안 군사훈련을 받은 나석주는 육군공병단 철도대에 파견되어 다시 1년간 훈련을 받았다. 마침내 1924년 중국군 순덕부에 배속되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그해 4월 상해로 돌아온다. 이는 아직 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 타도라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돌아온 나석주는 2년간의 군사훈련을 인정받고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된다. 경호원으로서 일제 경찰과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한편, 상해 교민단을 호위하는 일을 수행했다. 특히 나석주는 경호원으로 활동할 시기, 명성황후의 인척이던 민정식을 구금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하려 했다. 비록일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가던 상황에서 나석주의 행동은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은 나석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다.

나석주는 경무국장이 되었지만, 궁핍한 재정 형편과 인력 부족으로 독립운동을 펼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26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다. 의열단이 보여주는 의거 활동이 나석주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의열단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재정 부족으로 독립운동을 마음껏 펴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나석주는 하루라도 빨리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젊은 혈기로 하루빨리 독립을 바라던 나석주에게 독립운동이 침체에 빠진 1920년대 중반은 너무도 힘든 시기였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독립이 멀어진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넘어서 조급함이 밀려왔다. 독립운동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답답하던 나석주는 스스로 독립운동을 벌일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경제적 착취를 담당하던 일제 수탈 기구를 파괴함으로써 식민통치에 힘들어하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





나석주는 1925년 의열단 동지였던 이승춘에게 국내로 들어가 의거 활동을 하자고 제의했다. 무턱대고 의거 활동을 제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 스스로 권총과 폭탄 3개, 그리고 투탄 5~6개를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나석주가 의거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이었다. 대표적인 일제 수탈 기구인 조선총독부는 경비가 삼엄한 만큼 혼자서 의거에 성공할 확률이 낮았기에 배제했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대상으로 선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나석주의 집안이 소작농이었던데 기인한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토지에서 쫓겨나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했던 그의 경험이 장소 물색에 크게 반영되었다.

흔쾌히 승낙하리라 생각했던 이승춘은 나석주의 의거 계획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반대했다. 의거 활동으로 인한 효과보다는 나석주의 희생만이 있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승춘의 우려가 타당했던 이유는 거사에 필요한 자금조차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석주는 혼자의 힘으로라도 어떻게든 의거를 진행하려 했으나, 결국 자금 부족으로 훗날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26년 김창숙이 국내에서의 의거 활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자금은 마련되었으니 의거 활동을 펼칠 인물을 소개해달라고 김구와 이동녕에게 부탁했다. 이에 김구와 이동녕은 평소 의거 활동을 하겠다고 주장하던 나석주를 추천했다.

나석주는 김창숙에게 의거 활동비 1,000원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거사 자금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던 일을 드디어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승춘도 의거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에 나석주와 의거 활동을 함께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석주의 의거 계획은 일제가 의거 계획 정보를 입수하면서 지연되고 말았다. 결국 5개월이나 지연되는 동안 의거 활동비는 계속 줄어들었다. 이에 나석주는 자신이 먼저 국내에 들어가 의거 활동을 펼치고, 자금이 마련되는 데로 이승춘이 제2의 거사를 시행하기로 했다.

1926년 12월 26일 권총 1정과 실탄 70발, 그리고 폭탄 2개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온 나석주는 의거 장소 주변을 이틀 동안 돌아다니며 동선을 짰다. 드디어 28일 오후 2시경 나석주는 지금의 남대문로2가에 있던 식산은행에 힘껏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 장소인 지금의 을지로 2가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달려가 마지막 남은 하나의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이 폭탄마저도 터지지 않았다.

나석주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폭탄의 성능을 실험하지 못한 후회가 밀려왔다. 폭탄이 터지지 않은 것은 하나는 뇌관이 물에 젖었고, 한 개는 오래된 폭탄이라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의거 활동이 실패한 나석주는 자신에게 더는 기회가 없음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달려드는 일제 경찰과 동양척식 주식회사 관리들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7명의 일본인을 죽인 나석주는 총구를 자신의 가슴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누구보다 나라의 독립을 바라던 나석주의 죽음은 한반도를 넘어 모든 한국인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일제는 나석주의 의거 활동을 비하하기 위해 안전핀도 뽑지 않고 폭탄을 던졌다는 거짓 보도를 냈다. 이로써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무능력하고 무지한지를 한국인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나석주가 수년간 군사훈련을 받았던 유능한 인물이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일제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왜곡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나석주는 비록 의거 활동에 실패했지만, 그의 뜻과 염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는 나석주의 의거 활동에 힘을 하나로 합쳐 독립운동하지 못한 것을 반성했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식민지하에서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힘들어하던 많은 사람은 독립운동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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