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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22. 2022

미국인도 존경하는 인물 안창호(1878~1938)

1/3편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는 미국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하 선생 생략)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고 지명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리버사이드 시청 앞에 안창호 동상을 건립하고 인터체인지 이름을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Dosan Ahn Chang Ho Memorial Interchange)’로 명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도산 안창호 우체국, 패밀리 하우스(한국학 연구소)가 운영되고 있다. 심지어 리버사이드는 8월 11일, 캘리포니아주는 11월 9일을 도산 안찬호의 날로 기념일로 제정하여 미국의 많은 시민에게 그의 정신과 업적을 알리고 있다. 특히 2012년에는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안창호의 이름과 발자국이 헌액되기도 하였다. 당시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을 운영하는 트럼펫어워즈 재단 부이사장은 "안창호는 평화를 사랑했던 한국의 마틴 루터 킹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췄다."라며 안창호가 헌액되는 이유로 밝혔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활동하던 20세기 초는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겪어야 했던 시기로 많은 한국인이 나라도 없는 망국의 신분으로 미국인들의 무시와 멸시를 당하며 살던 시기였다. 분명 우리에게 안창호는 너무도 훌륭하고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지만, 미국인들의 눈에는 크게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는 시기였다. 그렇기에 오늘날 미국에 안창호 동상과 지명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약간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국은 안창호의 어떤 모습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일까?

또한 미국에서 안창호를 기념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에게 안창호의 업적과 활동을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안창호를 기리는 도산공원과 기념관이 서울에 있고, 우리는 학교 수업 시간과 언론을 통해 안창호를 수없이 접했다. 그러나 막상 안창호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하면 그의 정신과 업적이 머리에서 바로 생각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안창호의 업적과 활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한국의 마틴 루터 킹으로 평가받는 안창호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농사를 짓던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안창호는 동네 어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안창호가 소리높여 책을 읽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던 안창호는 평양으로 이사를 온 후 본격적으로 집과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충과 효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1894년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청과 일본이 벌인 청·일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청과 일본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선의 국토를 짓밟고 한인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는 과정에서 무능력한 정부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더 큰 문제는 정작 자신도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깊은 고심에 빠져있던 안창호는 안악 출신의 필대은과 밤새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앞으로의 자신의 행보를 결정하게 된다. 조선이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고 서울로 상경했다.


우선 능력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16살의 안창호는 언더우드가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주던 구세 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신학문을 익혔다. 그러던 중 1897년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독립협회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너무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구국운동에 헌신하려는 마음에 안창호는 바로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이듬해 독립협회 관서지부조직을 조직하여 평양으로 돌아온 안창호는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의 불을 지폈다. 쾌재정에서 소리높여 군중에게 외친 연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는지, 이승훈은 훗날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이때 마련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안창호는 말로만 자주독립을 외치지 않았다. 독립협회가 해체되자 근대적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점진학교를 설립하였다. 나라를 위한 교육에는 남녀가 없다는 신념으로 당시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남녀공학으로 운영한 점진학교는 관서 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사립학교이기도 했다.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이며 민중의 경제자립을 위해 노력하던 안창호는 어느 날 갑자기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안창호가 유학을 가고자 한 가장 큰 이유는 “선교사들은 문화운동을 할만한 수양을 가진 이가 적었고, 그들의 정책이 단순한 종교만 전파하고 문화운동에는 매우 등한시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민정책을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선교사에게 배운 지식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판단이 제일 컸다. 그리고 24살이 되던 1902년 이혜린과 결혼한 이튿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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