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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29. 2022

미국인도 존경하는 인물 안창호 2/3

아내와 함께 학교에 입학하여 일과 공부에 매진하던 안창호는 일부 한국인들이 무지와 이기적인 행동으로 미국인에게 비난받고 차별받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안창호는 “미국 사람들은 한국인을 야만으로 보고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볼 것이다. 이들을 잘 지도하여 모범이 되게 하여야만 한국이 독립자격이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라며 한국인의 삶과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1903년 한인친목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광복에 기여하는 목표를 가진 공립협회로 발전시켜, 미주 한인들만의 힘으로 회관을 건립하고 순한글신문인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이후 공립협회는 안창호와 미주 한인들의 끊임없는 희생과 노력으로 중국까지 활동 범위가 확대되어 원동지회와 만주지회가 설립되었다. 이것이 안창호 스스로 회비를 한 푼도 개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 외치며 늘 깨끗한 옷을 입고 일하는 등 모범을 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서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조금씩 개선되는 것과는 달리,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누구에게도 확연하게 보였다. 안창호는 미국을 넘어 국내외 민족운동단체를 하나로 결집시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대한신민회를 발기했다. 그리고는 곧장 국내로 돌아와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 조직을 논의한 뒤, 1907년 4월 창립하였다. 


신민회의 일원으로 일본의 눈의 피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하는 의거로 안창호는 다른 신민회 요인들과 함께 용산헌병대에서 두 달 동안 조사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것에 한계를 느낀 안창호는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독립군을 창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과 만주 길림성 밀산현에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로 했던 이종호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 안창호는 독립자금 마련과 미국 교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공립협회 확대와 동시에 여러 개로 나뉘어 있던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하와이 한인협성협회를 통합하여 국민회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출범시켰다. 독립을 원하는 많은 한국인이 안창호를 믿고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한 결과, 북미·하와이·멕시코·시베리아·만주까지 지방총회를 설치하는 등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멕시코·러시아는 대한인국민회가 교민들의 여행권 발부나 신분 보장을 담당하는 일을 인정하며 준정부기관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1913년 이승만이 하와이를 기반을 둔 박용만을 배제하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다툼으로 하와이 지방총회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만주지방총회가 해체되고, 그다음 해인 1915년에는 러시아제국의 탄압으로 시베리아 총회가 폐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안창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돌아다니며 바라본 한국의 현실과 여러 번의 독립운동 실패를 겪은 안창호는 우리 민족이 아직은 독립을 달성할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민주주의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나라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국제연맹이나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 독립을 이루어 낼 청년을 양성하기 위해 조직한 흥사단을 키우는 데 전념을 다 했다. 

1913년 한국 8도를 대표하는 8명의 정예단원으로 시작한 흥사단은 ‘혁명을 중심으로 한 투사의 인격을 훈련하고, 혁명 투사의 결합’이라는 목표 아래 이론보다는 행동과 실천이 우선이라는 무실역행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졌다. 안창호의 “나라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네가 건전 인격이 되어라.”라는 말에 감명을 받아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흥사단에 가입한 수많은 청년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값진 구슬땀을 흘리며 나라를 되찾을 미래의 독립운동가로서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순간 안창호에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쁘고도 벅찬 소식이 들려왔다. 나라를 되찾겠다며 모든 한국인이 거리로 나와 만세시위를 벌였다는 3·1운동 소식에 안창호는 기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직 역량을 갖추지 못했지만, 모든 한국인들이 나라를 되찾아 이 땅의 주인이 되고자 분연히 일어섰다는 사실에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이 소중한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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