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Apr 05. 2022

미국인도 존경하는 인물 안창호 3/3


안창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국민회 대표로 상해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상해로 가는 도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선임된 안창호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의 주권을 되찾고, 한반도에 모범적 공화국을 세워 국민이 행복을 누리며, 동양 평화를 넘어 세계 평화를 돕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겠다.”라고 포부를 다짐했다. 하지만, 독립을 위한 큰 발걸음이 드디어 띄어졌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부분열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분열의 시작점에 이승만이 있었다. 대통령제와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던 초대 국무총리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직권으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했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자, 안창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1923년 국내외 135개 독립운동단체에서 158명의 대표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고자 모였고, 그중 125명의 대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앞날을 논의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방향을 두고 많은 이견을 보인 독립운동가들은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로 더욱 분열될 뿐이었다. 도저히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국민대표회의 결과가 좋지 않자, 안창호는 새로운 대안으로 남경·북경을 시작으로 만주와 내몽고 심지어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다니며 독립운동 기지를 세울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그리고 1920년대 독립운동이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로 나뉘어 분열되자, 안창호는 해결책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독립당을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자치론자를 배제하고 유일당을 만들자고 북경과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설득한 끝에 1927년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일어난 내전의 영향으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에서 사회주의계가 이탈하자, 안창호는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 내에서 통일된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그 결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되면서, 한인애국단 운영 등 독립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인 안창호를 일제가 가만둘 리가 없었다. 1931년 난징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준비하던 안창호를 윤봉길 의거의 배후라는 죄명으로 상해에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했다. 재판 결과 안창호는 4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2년 6개월만인 1935년 가출옥했지만, 일제의 온갖 고문으로 안창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럼에도 안창호는 지방 순회를 다니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알리려 노력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결국 안창호는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송태산장을 지어 새로운 독립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은거에 들어갔다.


안창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일제는 안창호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두려웠다. 안창호가 한국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1937년 수양동우회가 흥사단과 통합하여 계몽 활동을 펼친 배후에 안창호가 있다며 강제로 체포하여 종로 경찰서로 끌고 갔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받았는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안창호는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 


일제는 안창호가 곧 죽을 것이라 예상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실제로 출소한 지 얼마 뒤인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일제는 안창호의 죽음에 한국인들이 큰 소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몇몇 인척들만 불러 조용히 장례식을 치렀다. 안창호의 유해가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에도 경찰을 배치하여 혹시라도 모를 한국인들의 소요를 미리 방지하고자 했다.

안창호는 일평생을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진정한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반성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신부터 변하면 모두가 바뀔 것이라 강조하며, 안창호는 독립을 향한 노력이 번번이 막히고 무너질 때마다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에게서 문제점과 해결점을 찾았다. 그래서일까? 안창호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의 부족함으로 많은 동포가 고생한다고 여겼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하였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패망하오. 아무런 곤란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


“낙망(희망을 잃음)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돼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위의 어록처럼 안창호는 오로지 독립을 위해서만 살았고, 평생을 무실·역행·충의·용감을 강조했다. 나부터 주인의식을 가지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라고 강조하던 안창호는 독립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독립 이후 공화정체에서 공론으로 운영되는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이 이 사회의 주역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희망했다.


그래서일까? 미국은 안창호의 말과 행동이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존중받기를 희망한다. 그런 판단 이면에는 안창호에 의해 훌륭한 시민의식을 갖춘 한국인들이 미국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앞으로도 안창호를 비롯한 미국 사회에 정착한 한국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주기를 희망한다. 미국도 인정한 위인 안창호를 우리가 더욱 잘 알고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는 세상을 꿈꿔본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인도 존경하는 인물 안창호 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