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대공원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동상이 많다. 그중에서도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에 힘쓰고 광복 이후의 자주 국가를 꿈꾸던 고하 송진우(1890~1945) 선생이 있다. 송진우 선생(이하 선생은 생략)은 일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아왔지만,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분이기도 하다. 하나의 예로 인터넷에 송진우를 검색하면 출생년도가 1887, 1889, 1890년으로 각각 다르게 표기된다. 여기서는 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 사업회에 표기된 1890년을 출생년도로 표시하였다.
송진우는 전라도 담양의 한적한 동네에서 태어났다. 담양은 예로부터 충절이 살아있어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위인을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위해 일어선 의병 기삼연, 김직부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배웠던 송진우는 자연스레 민족정신이 함양되어있었다.
그러나 한학만으로는 급변하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처할 수 없었다. 새로운 학문을 익혀야 일제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송진우는 창평에 있는 영학숙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으나, 배움에 한계가 있었다. 송진우는 더 큰 세상을 알기 위해 일본 와세대 대학에 입학했다.
열심히 공부하던 송진우에게 1910년 청천벽력과 같은 한일강제병합 소식이 들려왔다. 송진우는 공부에 회의감을 가지고 잠시 포기하지만, 곧 메이지대학 법과로 전과한다. 이 시간동안 송진우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깊이 모색했다.
배움을 마친 송진우는 고국으로 돌아와 교육과 언론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일에 힘쓴다. 그 첫 번째로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와 더불어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단군과 세종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함께 모시는 삼성사를 남산에 건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와 메이지 왕을 모시는 조선 신궁을 세우면서 실패하게 된다.
송진우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3․1운동 당시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더욱 매진했다. 그로 인해 1년 반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했다. 출소한 송진우는 1921년 동아일보 제3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밝히고, 독립을 고취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잦은 검열로 기사는 삭제되고, 일제의 탄압을 받아야했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1922년 『민립대학의 필요성을 제창하노라』사설을 통해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의 당위성을 피력했고, 도쿄~오사카 왕복 우편비행대회에서 우승한 안창남(1901~1930)을 초청했다. 안창남이 비행기로 여의도에 도착하는 순간, 이곳에 모였던 5만여 명의 인파를 비롯해 모든 한국인들의 가슴에 자부심이 새겨졌다.
이 외에도 송진우는 한국인이 열등하다는 일제의 식민 사관에 맞서기 위해 전국 우량 어린이 선발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는 1950~70년대 어린이날 개최되던 우량아선발대회로 계승되기도 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물산장려운동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송진우는 일제를 비롯한 친일파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1924년에는 박춘금이 친일파를 모욕하는 사설을 실었다며 권총으로 협박했고, 조선총독부는 송진우를 동아일보 사장에서 끌어내렸다. 이런 송진우에게 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제의했으나, 국내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며 거절했다.
송진우는 1926년 모스크바 국제농민회본부 기념사『국제농민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를 게재했다가 보안법 위반죄로 6개월 실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탄압도 송진우를 막지 못했다. 다시 동아일보 사장으로 재취임한 송진우는 충남 아산에 국민성금으로 현충사 중건에 참여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다. 이런 노력들은 이순신 장군 후손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순신 장군의 검과 난중일기 같은 보물을 기증케 하였다.
무엇보다 송진우가 많은 사람들의 꽉 막힌 가슴을 뚫어준 사건이 있다. 1936년 제10회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 가슴에 붙어있던 일장기를 삭제하고 신문을 발간한 것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동아일보가 해낸 것이었다. 이는 오랜 경험에서 일제의 어떤 탄압이 다가올지 알면서도, 발간을 결정한 송진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황한 일제는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를 무기 정간시키고, 송진우를 사장에서 강제로 끌어내렸다.
이후 동아일보를 자진 폐간하도록 종용했으나, 송진우는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일제는 송진우를 강제 구금하며 1940년 동아일보를 폐간시켜버렸다. 송진우는 신문사가 사라졌지만, 애국 활동을 멈추진 않았다.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하자 송진우는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우리만의 힘으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어서 자주적인 나라를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송진우는 오랜 기간 신문사 운영을 통해 누구보다 국제정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국민대표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한 송진우는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또한 복간된 동아일보의 제8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혼란한 시대에 나아갈 바를 제시하였다. 더불어 신탁통치에 대해 미군정장관에게 반탁의 정당성을 피력하며, 정치활동을 펴나갔다.
이런 소신 있는 행동에 큰 위협을 느낀 한연우, 유근배 등 6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들이 12월 30일 송진우 자택을 찾아왔다. 그리고 송진우는 이들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56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언론인이자 교육인 그리고 독립 운동가였던 송진우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요즘 대한민국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유독 송진우가 생각난다. 송진우가 동아일보 사원들에게 강조했던 5가지가 있다.
1.제3자의 악평을 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사실만을 들어서 호평할 것.
2.남을 대할 때 면박을 주지 말 것.
3.거짓말을 말 것.
4.맡은 일을 정성껏 처리할 것.
5.돈에 깨끗할 것.
오늘날 언론인들이 이 다섯 가지를 마음속에 담고 활동한다면 국민들의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언론인들이 위 다섯 가지를 가슴깊이 새기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송진우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지금처럼 언론에 대해 가해지는 비판이 적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