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심훈

by 유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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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어느 때보다도 유독 뛰어난 문인들이 참 많았다. 이중에는 훌륭한 문학적 소질로 민족을 팔아먹는 친일 문학가도 있지만, 일제에 저항하는 문학작품을 쓰며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심훈(1901~1936)과 같은 민족 문인들이 더 많았다


심훈은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은 인물이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언론인이면서 영화감독이자 주연 배우로 활약을 했다. 특히 심훈의 여러 작품 중에서 우리가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작품으로 시『그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가 있다. 『그날이 오면』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심훈의 굳은 의지를 담겨 있다. 『상록수』는 일제의 우민화정책과 수탈로 인해 점차 피폐화되어가는 농어촌의 현실을 알리면서, 젊은 청년들이 해야 할 바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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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생략)


이처럼 항일의지를 담은 작품을 썼던 심훈은 1901년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 거주하던 심상정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했던 심훈은 가족들의 큰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고, 1915년에는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심훈의 일생은 큰 어려움이 없는 삶이 보장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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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심훈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는 차별과 억압에 분개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일본 교사가 노골적으로 한국인을 비하하고 모욕하자, 수학 시험답지를 백지로 내며 저항하였다. 그 결과 과목 낙제로 유급되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4학년이 되던 1919년에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8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야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독립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며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준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을 통해 심훈이 어떤 길을 걸을지 보여주었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

마음을 합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아아! 육체의 고통을 뛰어 넘는 정신의 맑음이여.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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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이후 심훈은 국문학자였던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을 배운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여러 독립운동가와 만남을 가졌다. 이회영, 신채호, 이동녕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심훈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특히 이회영 선생의 집에서 머문 두 달은 심훈이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 결과 심훈이 내린 결론은 일제에게 지친 한국인을 위로해주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1921년 항주 지강대학 국문학과를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서울로 돌아온 심훈은 신극 연구 단체인 국문회를 조직하였다. 그와 함께 1924년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섰다. 특히 이 시기에 심훈은 『장한몽』에서 남자 주인공 이수일 역을 맡으면서도 저항 작품을 발표하는 등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1926년에는 순종이 죽자 4월 29일 순종의 국장을 준비하는 돈화문에서 『통곡속에서』를 짓고 5월 16일 시대일보에 발표하며 일제에 글로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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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급료인상을 주장하며 강경하게 대응하던 기자들이 사표를 냈던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직장이 잃은 심훈은 관심 있던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이후 원고를 집필하고 감독과 주연으로 참여·제작한 『먼동이 틀 때』가 흥행에 크게 성공한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과 사회부조리를 묵인할 수 없었던 심훈은 세상에 진실을 알리기 위해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기자로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도 1930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그날이 오면』을 집필하고,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불사조』를 쓰다가 일제의 검열을 받아 중단하게 된다. 이후 자신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심훈은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부모님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일제의 검열로 무산되고 만다. 하지만 심훈은 일제에 대한 저항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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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계층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제시한 소설『상록수』가 1935년 동아일보에 당선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당선되면서 받은 상금 일부를 야학당에 기부하며, 인재 양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1936년에도 심훈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에 감격하여 쓴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발표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1936년 9월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서도 거침없는 남성다운 문체로 독립을 이야기하던 심훈이 질병에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심훈이기에 변절한 문인들과 함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용기와 희망을 제시하는 문학작품과 예술 활동을 통해 우리의 자긍심을 높이고 독립을 앞당기는데 일조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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