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4일 기사제목이 눈에 띈다. 『2050년 한국, ‘인구 재앙’덮친다.』(한국경제)에서 2050년 노인이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하며, 14세 이하가 9%가 예상되는 한국의 모습에 우려를 표하는 기사다. 모두가 걱정되는 마음으로 뉴스를 읽었다.
오늘날 저출산의 원인 중 하나가 어린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세상이라는 점이다. 베이비붐 세대 전후의 어르신들은 지금의 아이들이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한다. 형제가 줄어들면서 가족들이 거는 기대감과 지원이 높아질수록, 역설적으로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소유물이 되었다. 과거처럼 마음껏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놀 수 있는 자유가 사라져버렸다.
이는 방정환 선생(이하 선생 생략)이 ‘어린이 노래’를 『개벽』에 소개하면서 사용한‘어린이’의 뜻과 너무나 상반된다. 방정환은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한 인격체라는 의미로 ‘어린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금 어린이들이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방정환(1899~1931)은 어떻게 어린이를 위한 삶을 살았을까? 방정환은 어린 시절 2남 3녀 중 둘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이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있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성장하던 방정환이 9살이 되던 무렵 가세가 기울어버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방정환은 가난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였다. 권병덕이 조직한 ‘소년입지회’ 총대장이 되어 토론과 동화구연을 통해 8~9명에 불과했던 것을 160여명으로 크게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성과 꿈을 찾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방정환이 어서 빨리 직장을 갖고 집안을 일으켜주기를 바랐다. 방정환도 가족들의 어려움을 모른 체할 수 없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어서 담임선생님이 조선은행 서기로 취직시켜주겠다는 말도 뿌리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당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제강점기였으며, 한국인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시절이었다. 문학과 동화구연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도, 생활비 한 푼을 벌기 어려웠던 방정환은 결국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베껴 쓰는 사자생으로 취직하였다.
자칫 평범한 삶을 살아갔을 방정환에게 인생 전환점이 찾아왔다. ‘소년입지회’를 조직했던 권병덕이 방정환을 손병희 선생에게 소개한 것이다. 손병희 선생이 방정환의 됨됨이를 보고 셋째 딸과의 만남을 허락하면서, 방정환은 19살에 손용화와 결혼을 하였다. 이로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사회․경제적 제약으로 자신처럼 꿈을 포기하는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어린이 모두가 꿈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행복한 어린이들이 온전한 인격체로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릴 것이라 확신했다.
곧 방정환은 ‘경성청년구락부’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음악회와 연극 그리고 『신청년』 책자를 통해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방정환도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번역과 글을 써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이와 더불어 3․1운동에 모든 민족의 참여를 독려하는‘동원령’연극을 연출하고, 비밀리에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일주일동안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더욱 키워야한다고 생각한 방정환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경에서 학업을 이어가면서도‘천도교 청년회’를 설립하여 젊은이들에게 천도교와 새로운 학문을 익히도록 권유하는 강연을 다녔다. 방학이면 국내로 들어와 ‘천도교 소년회’로 조직하고 어린이 인격 옹호, 어린이 정서 함양, 건전한 사회성 함양을 기르는데 힘을 다했다.
특히 1923년 방정환은 『어린이』를 창간(1923~1949)하고 색동회를 조직한 중요한 해였다. 방정환은 창간사로 “죄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든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사람이 모두, 이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라며 어린이들이 독립된 나라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하였다.
‘색동회’에서는‘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된 5월 1일을 어린이날을 제정․결의하였다. 일제는 어린이를 위한 활동도 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탄압하였다. 여기에 노동자의 날과 어린이날이 겹치며 일제의 탄압을 심하게 받게 되자, 1928년부터 5월 첫 번째 일요일로 어린이날을 변경하였다.
계속된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소년운동진영이 분열되고 재정난이 심각해졌다. 『학생 잡지(1929.1~1930.1)』 발간사에서 힘들어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방정환을 만날 수 있다.
‘첫째, 편집편(便)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학생잡지를 한다 하면 그 내용 설명을 듣지 않고도 누가 하든지 으레 나아갈 길이 뻔하지 않습니까. (중략) 쓰기는 우리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쓰지마는, 책에 싣고 못 싣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둘째는 경영편으로 생각해 봅시다. 조선사람으로 중학정도와 전문정도의 학생이 남녀, 야학(夜學)강습소까지 합쳐도 5만명을 넘지 못한답니다. (중략) 아무리 적게 잡더라도 1만부 못나가는 것은 경영할 재주가 없습니다.”
힘들어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활동을 멈추지 않던 방정환이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로 몸은 엉망이 되어갔다. 결국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잊힌 줄 알았던 방정환이 꿈꾸던 세상은 색동회가 1946년 5월 5일(46년 첫 번째 일요일이었으며, 이후 날짜가 변경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정함.) 휘문중학교에서 어린이날을 다시 기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꾸준하게 거행되던 어린이날은 1975년 법정공휴일이 되었다. 이로서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은 어린이가 이 세상의 주역임을 알게 되었다.
저출산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어린이가 행복하면 어른도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 아이가 있어 행복해지는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아닐까? 방정환 묘비명이 아이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동심여선(童心如仙)이다. 선계처럼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라고 먼저 말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