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을 넘어 민족대표가 된 손병희

by 유정호

19세기 세도정치와 강화도 조약 이후 외세 침탈로 신음하던 민초들은 1894년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곡괭이와 죽창을 들고 일어섰다. 민초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 동학이었다. 1919년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이라는 목표를 온 국민이 공유하도록 3․1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시위를 당긴데에도 천도교(동학)가 있었다. 그리고 천도교가 종교를 넘어 독립운동의 상징이 될 수 있게 만든 중심에 손병희 선생(이하 선생은 생략)이 있었다.


손병희(1861~1922)는 충북 청주의 아전이던 손두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재가녀였기에 어려서부터 손병희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서자로서 많은 차별을 받아야했다. 손병희는 서자이기에 차별받는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부르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차별에 대한 서운함과 잘못을 토로하였다. 아버지는 손병희에게 다른 아들과 똑같이 대하겠다고 했지만, 손병희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골수로 사회를 부정하고 비난하지 않았다. 잘못된 것을 용납하지 않고 바로 잡으려는 정의로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손병희에게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며,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학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22살이 되던 1882년 큰 조카였던 손천민에 의해 동학에 입도한 손병희는 제2대 교주였던 최시형을 만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닫는다. 그는 동학으로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바로 잡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손병희는 1892년 동학을 만든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시작으로 93년에는 충북 보은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을 내세우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민중들에게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런 가운데 1894년 호남지역에서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부접통령이던 손병희는 전봉준과 함께 하기를 희망했지만, 동학의 북접은 조정과의 무력충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청과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국내로 들어와서 조선에 대한 우위권을 장악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 일본은 경복궁을 군대로 에워싸고 고종을 협박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라 강요하는 등 우리의 주권을 대놓고 무시하였다. 이는 동학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기로 다가왔다. 그동안 남접과 뜻을 함께 하지 않던 동학 북접도 일본의 만행에 전봉준과 뜻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손병희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우금치 전투에 참여하나, 일본의 우세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함경도와 평안도로 피신했다. 피신하는 과정에서도 동학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포교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손병희는 최시형을 대신해 실질적인 교주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후 최시형이 처형당한 후 1897년에는 정식으로 제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일본의 힘을 직접 체감한 손병희는 서구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을 통해 미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그 대안으로 일본에 머물며 서구문물을 익히기로 한다. 그와 함께 유능한 젊은이들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동경 유학을 장려하고 도와주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외세에 의존한 광무개혁은 득보다 실이 더 많았고, 일본과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1904년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일본과 함께 대한제국을 전승국가로 만들어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 국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 실천으로 이용구를 통해 회원 11만에 달하는 진보회를 국내에 조직하여 사회변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동학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대한제국이 진보회를 탄압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송병준을 내세운 친일단체 유신회를 일진회로 바꾸어 진보회와 통합시켰다. 이 과정에서 진보회는 일진회로 흡수되어 친일단체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일본을 이용하려던 계획이 역이용당하면서 동학은 친일 종교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1905년 이용구를 쫓아내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여 이미지 개선에 성공했으나, 이용구가 천도교의 많은 재산을 빼돌리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손병희는 1906년 국내로 돌아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성미법을 시행하였다. 성미법이란 밥을 하기 전 식구마다 한 숟가락씩 덜어내 천도교에 성금으로 내는 제도로, 당시 많은 신자들이 동참하여 천도교는 교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손병희는 이 돈으로 보성학교와 동덕여자의숙 등 수십 개의 학교를 인수하거나 지원하면서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박문사 인쇄소를 설립하고 만세보 창간을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을 한국인에게 보여주며 자주독립 국가가 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기울어진 대한제국은 다시 바로서지를 못했다. 결국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천도교도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교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만행으로 민족의 울분이 쌓여있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처리과정에서 식민지였던 여러 국가의 독립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일본에서 젊은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외치자 민족지도자들은 지금이야말로 독립을 이룰 기회라고 생각했다.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와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일본을 향해 독립선언을 하고, 학생들과 연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손병희가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한 것이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기독교 이승훈에게 5천원, 상해 신한청년당에게 3만원, 만주 독립자금 6만원 등 거금을 흔쾌히 내놓았다. 당시 100원은 오늘날 2백만원에 해당한다고 보았을 때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천도교 대표 15인, 기독교 대표 16인, 불교 대표 2인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명을 한 기미독립선언서가 작성되자, 손병희는 보성사에서 2만 1천장을 인쇄하도록 하였다. 인쇄도중 종로경찰서의 친일순사였던 신승희가 급습하자, 손병희는 5천원으로 신승희를 매수하여 만세운동이 진행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는 전국에 배포되어, 3․1운동이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손병희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3․1운동 당시 학생들과의 연대 약속을 지키지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일제경찰에게 스스로 신고하고 잡혀 들어가 징역 3년을 받았고,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점은 학생들이 겪었던 고충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 중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초심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손병희도 러․일전쟁에서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이용구를 중용하는 등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적도 있다. 그러나 손병희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면 젊은 시절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 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나라를 되찾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결정적으로 손병희가 없었다면 거족적인 3․1운동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손병희가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도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손병희가 형무소에서 죽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손병희가 형무소에서 죽을 경우, 불어닥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던 일제는 서둘러 병보석을 핑계로 풀어준 것이다. 이처럼 종교를 넘어 민족지도자로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손병희의 동상이 3.1운동의 시작점인 탑골공원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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