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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06. 2017

백제 무왕의 꿈을 담았던 익산 미륵사지

전라북도 익산시

                


세계문화유산임을 보여주는 안내표식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백제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가을에 방문했던 미륵사지가 떠올랐습니다. 미륵사지에 서서 과거에 매우 웅장했었을 미륵사를 상상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을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써봅니다. 현재 미륵사지에서는 미륵사지 석탑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복원 과정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어, 방문하는 이들이 복원 과정을 직접 보며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륵사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선정되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해체된 석탑 일부


얼마 뒤 미륵사지 석탑 복원이 끝나면 복원하는 과정을 볼 수가 없으니 과거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복원하는지를 보려면 지금 방문하는 것이 가장 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미륵사지에는 해체된 수많은 석탑의 일부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석탑 내부에 들어간 석자재를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너른 장소에 분류되어있는 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많은 양의 돌들이 산에서 채굴되어 석공들의 수많은 노고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과거 불국사의 무영탑을 만드는 아사달이 왜 수년 동안 사랑하는 아내를 보지 못했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석탑을 하나 올리는 일은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는 역사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미륵사지를 방문한다면 천년 이상 오랜 세월을 견디며 부서지고 마모된 석탑이 어떤 과정을 통해 복원되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복원된 미륵사 동탑


7세기 백제 무왕 때 건립된 미륵사는 동쪽과 서쪽으로 9층 석탑이 존재하고 중앙에는 큰 목탑이 존재했던 어마하게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세월 속에서 변고를 겪으며 미륵사와 동탑도 사라져 버리고 서탑(미륵사지 석탑)만이 훼손된 상태로 남아있었습니다. 미륵사를 복원하는 과정 속에서 서탑을 모델로 동탑(동원 구층 석탑)을 1992년도에 복원하여 미륵사지 석탑의 원래 모형이 어떠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구조의 동탑


동원 구층 석탑은 건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적한 느낌은 주지 못하지만 주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석탑과는 다르게 석탑 내부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석탑 내부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적다 보니 석탑 안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니다. 막상 들어가면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동원 구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모델로 복원했다고 하는데, 관람하는 저로서는 오히려 동쪽 석탑을 통해 복원되어가는 미륵사지 석탑의 웅장한 모습을 상상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미륵사지 석탑에 들어간 석재와 동원 구층 석탑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 복원 과정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이 동원 구층 석탑에 대한 설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원 구층 석탑은 총 27.8m 높이에 석탑을 조성하는데 들어간 석재만 2,700여 톤이라고 하니 탑을 올리는 일이 보통 큰일이 아니었음수 있습니다.


석탑을 올리는데 2,700톤이 들어갔다는 것이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석탑을 볼 때에는 많은 양의 석재가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데 실제로 해체시켜놓은 것을 보니 어마어마한 양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돌들이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해놓은 석재의 일부로, 이것만 해도 어마한 양으로 직접 미륵사에 가서 보시게 되면 모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동원 구층 석탑 앞으로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를 마주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사찰에서 쉽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간지주의 모습에서 사찰의 역사와 영광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백제 무왕 때부터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미륵사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번창하여 당시 이곳 미륵사 당간지주에 커다란 깃발이 흩날리며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도움으로 백제가 번창하기를 바라면서 개인의 안위와 행복도 기원했을 것입니다.  


참고로 사진에서 두 개의 돌기둥을 지주라고 하는데, 당간지주는 삼한시대 종교적 영역이었던 소도가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주는 솟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간지주는 사찰에 있는 산신각과 같이 불교가 우리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융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기도 합니다.





미륵사에 있는 작은 연못


미륵사지는 산 밑으로 넓게 펼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유적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는 미륵사지터를 보면 과거의 미륵사 모습이 떠오르며 웅장했을 미륵사의 위용에 감탄과 전율을 느껴 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봐야 하는 우리의 역사에 가끔은 안타까운 마음들지만 요즈음 오히려 상상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며 그려보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미륵사가 복원된다면 외롭지 않을 동원 구층 석탑


미륵사지와 관련된 설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동요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백제의 서동(훗날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신라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남들 모르게 밤마다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이러한 소문을 담고 있는 노래가 서동요로 신라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지자 선화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궁궐에서 쫓겨나 아무 곳도 갈 곳이 없는 선화공주를 다독이며 결국 자신의 아내로 만들고 훗날 서동이 백제의 왕이 되어 선화공주와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의 서동요는 드라마로도 많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백제 무왕과 결혼한 선화공주가 어느 날 연못에서 미륵 삼존불을 보고 난 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창건한 사찰이

미륵사라는 유래가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 설화에 대해 많은 후대 사람들은 의문이 가졌습니다.





복원 중인 미륵사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두고 벌인 전쟁에서 백제 성왕이 죽자 양국은 원수지간이 되어버립니다. 성왕의 죽음  이후 백제와 신라는 매우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평화를 기약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 공주가 백제왕에게 시집을 올 수 있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신라의 기록에는 진평왕에게 선화공주가 있다는 자료가 없고 고려시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만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선화공주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미륵사가 선화공주에 의해 창건되어졌는가에 대한 의혹은 계속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정확히 밝혀질 수 있다는 기대가 컸습니다.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높게 받기도 했습니다. 미륵사 창건에 시주한 사람이 백제 8대 가문 중 하나였던 '사택'의 딸이라고 밝혀지면서

선화공주가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더욱 의문을 품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화공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면서 7세기의 삼국 간의 관계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복원 중인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정확히는 서탑)을 복원하는 장소에 들어서면 1층과 2층에서 복원되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이 워낙 많이 훼손된 상태이기에 석탑의 정확한 층수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탑의 모형과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을 참고 삼아 미륵사지 석탑이 9층이 아닐까 추정하고 복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미륵사지 석탑 2층을 복원하고 있었습니다.





2층에서 바라본 복원 중인 미륵사지 석탑


위 사진은 복원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을 2층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미륵사지 석탑 자체가 훼손된 부분이 많아서 복원 자체가 매우 힘든 과정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석탑의 색깔이 부분별로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원 과정을 거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 자재


미륵사지 석탑 옆으로 복원되는 석탑의 자재를 보면 복원되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가 있습니다. 사진 속 돌을 보게 되면 좌측이 어두운 색상의 부분이 1,400년 이상 세월을 견뎌온 석탑의 원래 부분이고, 우측의 밝은 색상의 돌이 복원을 위해 새로 만들어 붙여놓은 부분입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기존의 유물을 복원하는 모습을 처음 봤지만, 문화재를 복원하는 대한민국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감탄하게 됩니다. 돌을 붙인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지만 붙지 않는 성질을 가진 돌을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만드는 모습에 여러 번 놀라며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안 석탑의 일부 석재들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는 공사장 옆으로는 동안 석탑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그냥 버려졌던 석탑의 잔해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관심이 주어되면 이렇게 귀중한 보물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 수준이 더욱 높아져서 작은 것 하나도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미륵사 복원모형


복원 중인 미륵사지 석탑 옆에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서 과거 미륵사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도 있습니다. 미륵사의 좌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9층 석탑도 웅장하지만, 가운데 위치한 9층 목탑은 얼마나 더 웅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황룡사의 9층 목탑과 미륵사 9층 목탑 두 가지 모두 현재에 볼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기만 합니다.





미륵사 9층 목탑의 모형 


박물관에는 9층 목탑을 재현해놓은 모형이 있습니다. 모형만으로도 9층 목탑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륵사가 현재까지 존재했다면 우리는 백제가 조그마한 나라가 아니라 황해를 장악하고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던 강대국이었음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황해를 장악했던 강력했던 해상왕국 백제로 되돌아 가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멘트로 붕괴를 막았던 미륵사지 석탑 모형


박물관에는 미륵사지 석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시멘트로 석탑 일부를 채워놓았던 과거의 모습도 재현해 놓았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이 복원되더라도 그 과정을 모두 다 기록하고 모형을 만들어 남겨두는 것은 앞으로의 우리가 지양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싶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잘못된 것도 기록할 수 있는 문화와 풍토가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 말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 사리함


박물관에서 가장 놀랬던 것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 사리 함였습니다. 금제 사리함을 보면서 저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진 속에는 잘 나오지 못했지만 백제의 세공기술의 우수함과 미적인 아름다움은 당대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우아하고 화려했던 백제의 문화와 국력을 함축시켜 담아놓은 것이 금제 사리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륵사 건설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그림


또한 박물관에는 과거 미륵사를 축조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자료도 볼 수가 있어서, 그 옛날 석탑을 어떻게 축조했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미륵사지를 방문할 때만 해도 복원 중이라는 안내판에 실망을 하고, 미륵사지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휑한 모습에 또다시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미륵사지를 다 둘러본 후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복원을 통해 옛 것을 되살리려는 현재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앞으로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볼 수 있었기에 더욱 값진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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