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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03. 2020

무령왕릉은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


국민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 활동으로 공주에 있던 무령왕릉을 방문한 적이 있다무령왕릉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친구들과 줄을 맞추어 무령왕릉에 들어갔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개를 숙여 들어간 무령왕릉에서 왕의 시신을 받치던 베개를 보며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시절이 벌써 30년도 더 된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

올해 둘째 딸의 초등학교 졸업을 기념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코스를 잡으며 무령왕릉을 선택한 데에는 나도 초등학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한몫 차지했다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주는 무령왕릉을 방문한다면 딸과 공유할 추억 한가지가 추가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무령왕릉은 추억 속에 있던 장소와는 다른 곳이었다추억 속의 무령왕릉이 아님을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무령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헤매는 순간부터 설렘이 일었다웅진 시기의 백제 왕릉을 제대로 본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백제 왕릉은 시기에 따라 무덤 양식이 다르다백제는 건국하고 성장하는 과정마다 무덤 양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고분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백제가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했던 만큼 초기에는 마한변한진한에 있던 여러 소국의 무덤 양식과 비슷했다그러나 고구려 유민이 유입되면서 돌무지 무덤 양식으로 바뀌었다가 4세기 중반 이후 백제만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이후 무덤 양식이 변하게 된다중국 왕조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국제적 지위를 향상하고 백제의 중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중국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이 등장한다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무령왕릉이다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1971년의 일이다. 1,500년이 넘는 동안 아무도 몰랐던 무령왕릉의 존재는 억수로 비가 많이 쏟아지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고분 6호로 비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배수로를 만드는 도중 우연히 발견된다그곳은 누구도 고분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장소였다이는 무령왕릉을 직접 찾아가 보면 이해할 수 있다송산리 고분의 특징이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왕릉처럼 능이 독립되어 있지 않다여러 개의 고분이 하나의 봉분을 같이 쓰고 있는 듯 붙어있다그리고 고분마다 별도의 입구가 만들어져있다여기에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송산리 고분의 입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고분 5, 6호를 바라보았을 때우측으로 무령왕릉의 입구가 자리하고 있다그런데 입구가 감추어진 채 오랜 세월 드러나지 않았다당연히 입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옆의 고분과 다른 방향으로 입구가 존재할 거라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자연스레 무령왕릉은 고분 5, 6호의 봉분이라 여겨졌다.

이는 우리에게 있어 큰 축복이었다백제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상황에서 2,900여 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더욱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 쓰인 돌판이 발견되면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일반적으로 백제 고분의 경우 도굴로 인해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령왕릉의 발견은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큰일이었다.

물론 발굴에 대한 전문 지식과 기술도 부족했고역사에 대한 의식도 부족한 상황에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언론의 큰 관심이 쏠리면서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발굴 진행 과정을 방해했다기자들에 의해 밟혀 부서진 유물도 나왔다발굴단도 크나큰 관심에 부담감과 조급함으로 무령왕릉 발굴을 12시간 만에 마무리 지었다수년 또는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어야 할 발굴이 조속히 마무리되며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었다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이를 계기로 우리의 역사 인식과 발굴 지식과 기술이 크게 향상되는 효과도 가져왔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2,900여 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된 무령왕릉은 감추어졌던 백제를 세상에 드러내 주었다신에게 땅을 구입한 매지권과 무덤을 수호하는 진묘수를 통해 백제의 풍습과 종교 등 문화를 알 수 있었다무령왕과 왕비의 이름죽은 해 등이 적힌 지석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담고 있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도 있었다또한 벽돌무덤으로 중국 왕조금송으로 만들어진 관을 통해서는 왜와의 관계를 파악하고 백제의 뛰어난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역사적으로 중요한 무령왕릉의 수난은 무령왕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던 1997년까지 이어졌다많은 방문객이 무덤에 들어가 벽돌을 만지고 뛰는 등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관람객의 무지한 행동으로 훼손에 시달려야 했던 무령왕릉은 1997년에야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오히려 무령왕릉 입구에 자리한 고분 형태의 전시관이 방문객에게 백제의 역사와 고분에 대해 잘 알려준다무령왕릉만이 아니라 다른 고분의 내부를 재현해놓아 여유로우면서도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아이들에게도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교구들이 있어 학습적인 효과도 있다이제는 문화재를 직접 만져보고 싶다는 인식을 버려야 함을 알려주는 곳이 무령왕릉이기도 하다문화재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작은 욕심으로 시작되는 행동이 수천 년을 이어온 문화유산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준 곳이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이다.

무령왕릉 구경을 마치면 백제 왕실이 제사를 지내던 정지산 유적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무령왕릉에서 도보로 10여 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정지산 유적으로 가는 길은 작은 산책로를 걷는 듯 편안함을 준다그리고 정지산 유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크게 넓지는 않지만산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꽤 넓은 평탄한 지역이 나온다이곳은 과거 기와를 사용한 건물 1동과 부속 건물 7동이 자리하고 있었지만지금은 건물이 있던 자리를 나무 기둥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그래서 걸어왔을 때 허망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 정지산 유적에 오면 금강과 공산성이 내려다보인다금강과 공산성은 웅진으로 쫓겨 내려온 백제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였다금강을 끼고 공산성에서 고구려의 남하를 대비했을 문주왕을 시작으로 공주에서 재위하였던 여러 왕과 왕족들은 이곳에서 백제의 안정을 기원했을 것이다그리고 부흥도 다짐했을 것이다성왕이 538년 사비(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3년간 많은 왕족이 정지산에 올랐을 이곳은 오늘날 너무나 평온하다백제시대 왕족이 아니라면 함부로 올라오지 못했을 이곳은 무령왕릉을 방문한 이들도 잘 찾아오지 않는다하지만 무령왕릉을 방문했다면 정지산 유적지에 올라 백제 왕족이 되어보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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