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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pr 27. 2020

서희와 신라를 그리워하며 제를 올리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에 가면 잿머리 성황당이 있다공단에 둘러싸여 있고낮은 야산 위에 자리 잡은 작은 규모의 잿머리 성황당은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장소다과거와는 달리 전통 무속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더욱 잊혀진 곳이기도 하다오늘날에도 매년 10월 1일 잿머리 성황제가 열리지만많은 이들의 무관심 속에 진행된다하지만 잿머리 성황당은 다른 지역의 성황당하고는 출발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과거 안산은 지금의 공업 도시의 모습하고는 많이 달랐다안산(安山)은 지명에 드러나듯 낮은 야산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높은 산이 없어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데 매우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바다와 인접하여 해산물도 풍부하여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장소다초지동과 대부도에 신석기시대의 조개무덤과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어 이를 증명한다그러나 사람들이 살기 좋다는 것은 많은 전쟁이 있었음을 내포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서 존재했지만, 6세기 중반 장수왕이 한성을 차지하면서 고구려 영토가 되어 장항구현으로 불렸다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신라 진흥왕이 한강 하류를 점령하면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안산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역을 담당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였다통일 신라 시대에도 안산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었다.





하지만 통일 신라 말 중앙 정부가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안산에도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이 등장했다안산 김씨의 시조인 김긍필의 선조가 안산을 발판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김긍필은 고려 시대 좌복야 벼슬을 한 인물로그의 아들 김은부가 자신의 세 딸을 덕종·정종·문종의 왕비로 만들면서 막강한 힘을 가진 집안으로 발전하였다김긍필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이었다는 점(가문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신라 왕실과 연계시켰다는 설도 있다.)에서 고려 초 안산은 신라에 호의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잿머리 성황당에서 경순왕의 부인 홍씨와 장모 안씨 부인을 위한 성황제를 연다는 것이다서희가 사신단으로 중국 송나라를 향해 출발하려고 하는데바람이 거칠어 배를 띄울 수 없었다서희는 바람이 잔잔해져 안전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제사를 올리고 잠이 들었는데꿈속에서 소복을 입은 두 여인이 나타났다두 여인은 자신들이 경순왕의 부인인 홍씨와 장모 안씨라고 밝히며자신들을 위한 제를 올려달라고 하였다그리고 자신들이 머물 거처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두 문제만 해결해주면 안전하게 출항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경순왕이 죽은 후에도 경주로 가지 못하고 경기도 연천에 묻혀있는 상황에서 두 여인을 위한 공간과 제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희는 안산의 관리를 불러 사당을 짓고화공에게는 두 여인의 영정을 그리도록 하여 성황제를 올렸다성황제가 끝나자 바닷물은 잠잠해졌고서희는 안전하게 중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성황제를 올린 이후 바다가 얌전해진 것을 보고매년 서희와 두 여인을 위한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여기에는 고려의 계승의식이 신라로 변화되는 현실이 반영되어있다고려는 건국 초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으나지배계층과 대외관계 등으로 계승의식이 신라로 변화되었다신라가 가진 1,000년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또한 신라 6두품 계열의 인사들이 고려 중앙 정치를 장악하면서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였다더욱이 고려 초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압박이 거세지면서고구려 계승의식이 점차 약해진 것도 한몫하였다. 6세기부터 서희(942~998)가 등장하기까지 400년 동안 안산이 신라의 영토로서 중국과의 교역에 중심이었기에 친신라적 성향이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희는 요와의 전쟁에서 적장 소손녕에게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내세우며 80만 대군을 내쫓은 인물이다그런 서희가 안산에서 경순왕의 부인과 장모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는 친신라적 행동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서희가 유능한 정치가이자 관료라는 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정치가에게 요구되는 자세 중 하나가 유연성이다서희가 요나라 80만 군대를 외교로써 내쫓고 강동 6주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명분만은 아니었다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며 당황하던 소손녕의 심리와 요가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음을 제대로 파악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사람의 심리와 정세의 흐름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서희를 보았을 때 잿머리 성황당이 세워진 이유가 납득이 된다안산은 혼란했던 통일 신라말에도 해적의 피해가 적어 신라에 대한 반감이 적었다그런데 중국으로 가는 고려의 사절단에 대규모 노동력과 물자를 제공하는 일을 주민들이 반길 리가 없었다자연스레 주민들의 반감이 높아졌다이에 서희는 안산 백성들이 옛 신라를 그리워하는 사실을 파악하고경순왕의 부인과 장모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더불어 성황당 주변으로 성을 쌓아 고려가 이 지역을 중요하게 여기며안산을 지켜주겠다는 의지를 백성들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준다는 것만큼 백성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없다백성들의 어지러웠던 마음을 다독여주었음은 설화에서 바닷물이 잠잠해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상황으로 표현되었다더욱이 서희가 누구인가요나라 80만 군대가 침입으로 고려 초 겪었던 최대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다그런 그가 안산을 위해 성을 쌓고 잿머리 성황당을 만들었으니안산 백성들에게 이보다 든든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잿머리 성황당에 서희도 모셔놓고 함께 제를 올렸다우리나라의 많은 성황당 중에 마을의 안녕을 벗어나 국가의 안녕을 위해 시작된 잿머리 성황제는 특별하다.
 
우리의 무속 신앙을 보면 국난 극복에 큰 힘을 기울인 위인을 신으로 모셔놓고개인의 안녕을 빌고 복을 바라는 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다이곳 잿머리 성황당에도 얼마 전까지 많은 무속인이 이곳에서 제를 올렸지만지금은 금지하고 있다성황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제를 올리는 장소가 있지만개인의 무속 행위를 금지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제를 올리는 장소에 서면 멀리 서해와 만나는 강줄기가 보인다지금은 잿머리 성황당 아래가 간척사업으로 공단이 들어서 있지만과거에는 갯벌이 펼쳐졌던 곳이다. 1,000년 전 밀물로 바닷물이 가득 찼을 때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먼 중국으로 떠나던 서희 사절단이 떠오르는 상상은 텅 빈 잿머리 성황당을 가득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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