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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11. 2020

삽살개마저도 슬퍼하다



원하지 않았지만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했던 공양왕(재위 1389~1392)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와 강원도 삼척시 두 곳에 있다비운에 죽어서일까고려에 대한 아쉬움이 커서일까공양왕처럼 능이 두 곳인 경우는 많지 않다일반적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능을 공양왕의 진짜로 생각한다. <세종실록>에 세종 19년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삼척시의 경우 공양왕이 삼척에서 죽었으며궁말(왕이 머물렀다는 의미)과 살해재(공양왕릉이 있는 고개)와 같은 지명이 남아있음을 내세우며 진짜 공양왕릉이라고 주장한다이처럼 두 곳의 능이 있는 이유는 공양왕이 어떻게 죽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양시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는 “1394년 유배지였던 삼척에 묘를 조성한 뒤, 12년 뒤 고양으로 이장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기재한 내용이 가장 타당성이 높다고 보인다.




공양왕은 왕이 될 위치도 아니었고스스로도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왕으로 추대되었을 때도 나는 평생동안 먹는 것입는 것이 풍족했다시중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런데 이 나이에 내가 이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라며 한탄했다그리고 이 무거운 짐을 어찌하면 좋으냐며 흘러내리는 눈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이때가 그의 나이 45세였다당시의 40대 중반은 인생의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나이였다더욱이 허수아비 왕으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자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공양왕이었다조준이 부귀한 집에서 성장하여 가산을 다스릴 줄은 알아도 나라를 다스릴 줄은 모른다.”며 즉위를 반대했을 때화는 났지만 한편으론 조준에 의해 다른 이가 왕으로 추대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공양왕이 왕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누구라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고려에 충성하는 관리를 제거했다. 1389년에는 우왕과 창왕이 고려 왕족이 아닌 신돈의 자손이라며 왕위에서 내쫓았다우왕의 어머니인 반야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이유였다하지만 여기에는 우왕이 대장군 김저에게 이성계를 없애라고 명령한 것이 기반에 깔려있었다.




공양왕은 왕에 올라 매 순간 불안에 떨어야 했다이성계와 급진파들은 공양왕을 내세운 뒤본격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정책을 시행했다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 무인을 제거하여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정치구조도 이조병조와 같은 6조로 바꾸고과전법을 통해 조선 건국에 참여하는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수도도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한양으로 천도하며 고려의 색채를 지워나갔다무엇보다도 우왕과 창왕을 죽이라는 주청에 승낙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무서웠을 것이다우왕과 창왕의 죽음이 비단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바로 자신의 미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공양왕이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승낙하고 자신이 죽는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정몽주가 살해되면서 고려를 지지하는 세력이 무너지자, “덕이 없고 어리석다.”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폐위된 공양왕은 원주로 쫓겨났고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원주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삼척으로 옮겨져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고양시에 있는 공양왕릉과 관련해서는 죽음의 과정이 다르다왕위를 이성계에서 넘겨준 공양왕은 살아남기 위해 아내와 아들 그리고 세 딸을 데리고 고양시로 도망쳤다이때 공양왕이 아끼던 삽살개도 따라왔다신분을 감추기 위해 성을 전 씨로 바꾸었지만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던 공양왕과 가족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배고픔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공양왕과 가족은 견달산 아래의 사찰을 찾아갔다남의 눈을 피해 도망치느라 몰골이 엉망이었으나왕의 기품을 숨기지는 못했나 보다스님들은 공양왕을 받아주는 것이 부담스러워사찰에 머물기는 어렵다며 은거하기 좋은 작은 암자를 알려주었다암자로 피신한 공양왕과 가족은 스님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삽살개가 연못 앞에서 크게 짖었다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님들이 연못물을 퍼내자공양왕과 왕비가 죽은 채로 나란히 누워있었다.
 
공양왕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은 이곳에 능을 조성하고왕과 관련된 지명을 붙였다스님들이 음식을 날라주었다는 식사동왕이 잠은 잔 곳이라는 어침이 마을왕이 머물렀던 암자가 있던 고개를 대궐고개왕릉이 있다는 왕릉골 등으로 지금도 불리고 있으나많은 이들이 지명의 어원을 알지 못한다어찌 보면 고려가 멸망한 지 6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공양왕의 능을 찾아가는 길도 고려의 멸망과 관련지어 가다 보면 씁쓸함이 밀려온다공양왕릉이 위치한 지역은 번화가와 거리가 멀다고양시의 도심지를 벗어나 건물과 차들도 뜸한 외진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공양왕릉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진입하면 과거에도 이곳이 외딴 지역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마을을 지나 산으로 막힌 곳에 다다르면 비로소 공양왕릉이 보인다.
 

공양왕릉에 도착했지만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풋살장이었다공양왕릉 바로 앞에 있는 풋살장에는 주말을 맞이하여 운동하는 분들의 힘찬 소리가 들려왔다풋살장이 자리한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조선 왕릉이었다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특히나 고양시는 조선의 왕과 왕족의 능이 많다자신과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왕들 사이에 누워있는 것도 힘들 텐데 처우마저도 이렇게 다르다 보니공양왕 스스로도 한탄하면서도 순응하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실제로도 공양왕의 능은 왕릉의 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다우선 능의 입구에 홍살문과 참도(능으로 가는 길그리고 정자각이 없다공양왕과 왕비의 능 앞에 위치하는 비석과 석상도 왕릉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정명등과 작은 크기의 석인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두 봉분 가운데에 위치한 비석도 고종 때 세워진 것으로 조선 시대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공양왕릉의 특이한 것은 비석 앞에 세워진 석수다석수는 왕릉골의 유래와 관련된 삽살개로 다른 왕릉에 있는 석수하고는 큰 차이점을 보인다무엇보다도 공양왕릉의 뒤로 자손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어 일반 사대부들의 선산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공양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최영 장군의 묘가 있다왕릉골에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공양왕이 이곳 연못에서 부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면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최영 장군을 그리워하며 찾아온 것은 아닐까이성계에 의해 최영 장군이 죽임을 당하면서 고려가 망국의 길로 갔기에 더욱 생각났을지도 모르겠다영원한 나라가 없고마지막 왕의 최후는 늘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때론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 아닌 망국의 책임을 져야 했던 인물을 찾는 것도 의미가 있다최영 장군묘와 공양왕릉을 방문하여 고려의 멸망을 바라보면우리가 해야 할 일이 보인다백성들의 염원을 읽지 못하고 과거에 해왔던 일을 답습하면새로운 사회를 만들 주체에게 공을 넘길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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