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May 18. 2020

선덕여왕에게 꼭 필요했던 분황사



왕권 강화를 위해 창건되다.
경주에는 수천 년에 걸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무덤인 오릉에서부터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내놓은 최 부자댁까지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여왕이 3명이고, 그중에서도 삼국통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에 더욱 눈길이 간다.
 
선덕여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진흥왕과 진평왕을 잇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즉위 초부터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힌 선덕여왕은 분황사(芬皇寺) 창건을 통해 극복하려 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도대체 분황사는 선덕여왕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사찰이었을까?
 
분황사는 이름에서부터 여성적인 색채가 묻어난다.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 즉 직역하면 향기로운 임금을 위한 사찰이 된다. 분황사가 왕이 주도한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창건했음을 보여준다. 신라 중고기 경주에는 45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그중 24개의 사찰이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 이는 법흥왕 이후 불교국가로서 변모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지만, 선덕여왕이 다른 왕들보다 불교의 힘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으므로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이 즉위하던 시기는 백제 무왕이 강력한 힘으로 신라를 괴롭히던 시기였다. 계속되는 백제의 공격에 힘들어하던 신라에게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어려운 여성이 왕으로 즉위하는 것은 매우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당시 여성이 군대를 이끄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군의 사기가 저하되는 등 인정받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다) 결국 선덕여왕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을 끌어들여 백제를 견제하거나, 종교적으로 불교를 통한 왕권 강화와 민심 안정이었다.
 
그러나 백제도 중국 당과의 협력에 크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당 태종도 여왕이라는 이유로 신라를 무시하고 있어 외교적 성과가 나오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으로 부처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널리 알려 민심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다. 선덕여왕은 그 일환으로 3년이 되던 해에 분황사를 634년 창건하고, 자장 대사를 모셨다. 중국에서 유학하며 크게 이름을 떨친 스님이기도 했지만, 그가 가져온 대장경 등은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임을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7층 또는 9층이었을 거라 예상되는 모전 석탑은 신라의 국력이 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효과도 가져왔다. 모전 석탑은 검은 회색을 띠는 단단한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 만든 탑이다. 당시 민간에서 쉽게 활용되던 건축 방식이 아니었다. 더 많은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 만큼 모전 석탑이 백성들에게 선덕여왕에 대한 불신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분황사에 있는 모전 석탑은 선덕여왕 당시에 세워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때 크게 파손되면서 현재는 3층만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 수리하려고 했지만, 불교가 억압받던 시절로 대규모 역사를 실행할 수 없어 더욱 손상되었다. 그 이후 1915년 수리한 것을 바탕으로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모전 석탑은 초기의 모습과 달라졌다. 예를 들어 내륙을 바라보는 수사자와 동해를 바라보는 암사자 6마리가 기단 위에 있었으나, 2마리는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1층의 감실 안에 있는 머리 없는 불상도 예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난을 극복하려 했던 노력은 초창기 성공적이었다. 636년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왕궁 서쪽에 있던 옥문지에 숨어있던 백제 군을 토벌했다는 기록 이후 642년까지 백제의 침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황사 건립과 함께 선덕여왕의 예지력은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분황사는 후대에도 호국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분황사에는 호국 불교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모전 석탑 북쪽 위에 자리한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이다. 삼룡변어정은 외부의 팔각모양은 팔정도를, 내부의 원형은 원불의 진리를 상징하며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물이 샘솟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삼룡변어정에 세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세 마리의 용은 나라를 지키는 호국 용이라 불렸는데, 원성왕 11년인 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가져가려 하자, 원성왕이 되찾아왔다고 한다. 이 또한 원성왕이 물이 넘쳐 왕궁에 오지 못한 김주원을 제치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약해진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인다.



 분황사에 내려오는 여러 설화
분황사가 선덕여왕과 원성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용되었지만, 원효하고도 깊은 관련이 있다. 원효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숭상받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큰 스님이다. 전국의 많은 사찰이 원효와의 연관을 내세우지만, 분황사만큼 연을 맺은 사찰이 드물다. 원효는 이곳 분황사에서 <화엄경소>와 <금강명경소> 등을 저술했고, 유해로 만든 소상(찰흙으로 만든 형상)이 있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도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하니, 많은 승려가 이곳 분황사를 찾았을 것이다. 또한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 시대, 숙종은 원효에게 화쟁국사(和諍國師)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분황사에 비를 세워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비는 사라지고 받침돌인 비좌만이 남아있다.
 
원효와 관련된 사찰은 직간접적으로 기이한 이야기들이 내려온다. 분황사 좌전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대비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신라 경덕왕 시절 희명의 다섯 살 된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희명은 눈을 뜨게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분황사 천수대비 벽화에 와서 아이에게 <도천수대비가>를 부르게 하였다. 아이가 절실한 마음으로 <도천수대비가>를 부르자 기도가 통했는지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도 분황사에는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를 모셔놓은 보광전이 자리하고 있다. 보광전 안에는 영조 때에 만들어진 약사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경덕왕 때에 강고내말이 만든 30만 6,700근의 약사여래불이 사라져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전설과 장엄했을 약사여래불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을 찾아와 기도를 올리게 만든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분황사
분황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일곱 가람(사찰)중의 하나로 1탑 2가람 형태의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규모가 매우 작다. 지금도 분명 스님이 거주하며 사찰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얼핏 보기에는 단순히 모전 석탑만을 보존하기 위한 작은 공간으로 보인다. 이는 3번의 중건과정에서 분황사의 터가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2차 중건 당시 1/5로 축소되었고, 3차 중건 때는 2차의 1/3로 줄어들었다. 그래서일까? 선덕여왕이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해 창건하고,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는 기억이 잊히고 있다. 많은 이들이 모전 석탑만을 보고 돌아가기에 바쁘다. 시간이 흘러가며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불변의 이치이기에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우리에게 분황사는 교과서에서 배운 모전 석탑만이 기억된다. 이를 기억하고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 황룡사가 몽골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분황사는 수많은 전쟁에서도 살아남아 우리 곁에 있다. 비록 온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보물이 아닐까? 황룡사가 2025년 복원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때 분황사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칠까? 최소한 지금처럼 홀로 덩그러니 외롭게 서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많은 이들이 황룡사와 분황사를 같이 방문할 테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삽살개마저도 슬퍼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