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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11. 2020

역사적 가치에 비해 초라한 초지진



서울 근교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이 찾는 곳이 강화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말이면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그래서 강화도로 들어가는 두 개의 대교,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는 늘 많은 차량이 드나든다. 그중 초지대교의 옆에는 강화도를 대표하는 초지진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에도 초지진은 서울로 들어가는 수로의 길목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곳에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요새인 초지진을 설치했다. 진이란 오늘날 대대급에 해당하는 병력이 주둔하던 군사기지로 초지진에는 군관 11명을 포함한 군사 320여 명이 주둔했다. 효종 7년인 1656년에 구축된 이후, 1763년에는 종3품의 무관이 초지진을 담당할 정도로 강화도 내에서도 초지진은 매우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


매우 중요했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풍파를 겪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19세기에 서양 세력이 조선으로 침략해오는 과정에서 초지진은 늘 격전의 장소였다. 프랑스가 침략해온 병인양요(1866), 미국이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 그리고 일본의 운요호 사건(1875)까지 초지진은 늘 그 중심에 있었다.
 


근현대사에서 이토록 중요했던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초지진은 실제로 볼 것이 많지 않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여 분이면 초지진 모두를 둘러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성인 기준 700원이라는 입장료를 내고 방문하기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강화도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보니 교통 체증이 발생하기 전에 빨리 이동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방문이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지진은 꼭 방문해야 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흥선대원군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끌어들이려다 실패하고, 9명의 선교사와 8,000여 명의 신자를 죽이는 병인박해(1866)가 일어났다.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 신부는 톈진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이던 로즈 제독에게 프랑스 선교사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를 기회라 여긴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했다.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제1차 침입에서 3척을 이끌고 서울의 양화진까지 와서 상황을 탐지한 프랑스군은 10월에는 7척의 함선을 이끌고 제2차 침입을 감행했다. 이후 한 달 가까이 강화도에 머물며 약탈하던 프랑스군은 초지진에서도 격전을 벌이며, 강화도에 큰 피해를 줬다.

프랑스군이 물러난 이후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던 조선은 1871년 미국의 침략을 받는다.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그해에 평양 대동강에서 불태워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그 이유였다. 미국은 조선에 배상금 지불과 개항을 요구했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로저스 아세아 함대 5척에 1,200여 명의 병력으로 영종도와 제물포 사이를 지나 강화도 초지진으로 몰려왔다. 이날이 1871년 4월 23일로 신미양요라 부른다.


미 해병 450여 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자, 조선군은 사력을 다해 맞섰다. 그러나 미국의 우세한 화력 앞에서 초지진의 방어시설은 무기력했다. 초지진에 있던 조선군이 보유한 40여 문의 대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 사용되던 구식 화포였다. 미국의 함선까지 포탄이 날아가지도 않았고, 폭발하지도 않아 파괴력도 매우 미약했다. 하지만, 조선군의 투지는 달랐다. 미 해병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물러섬이 없었다. 300여 명의 조선 병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당시 미군의 슐레이 대령은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말에 자랑스러움을 일순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오만함에 분노가 느껴지고, 선조들의 희생에 숙연해진다. 위의 말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재물을 파괴한 미군이 할 이야기가 아니다. 마치 힘센 폭력배가 약자를 때리고 돈을 갈취하면서, ‘나에게 끝까지 맞서다니. 눈빛이 살아있어. 칭찬해.’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미군이 남긴 말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찾기보다는 그들이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오만함을 느껴야 한다.
 


미군은 자신들의 말과는 달리 군기고, 화약고 등 초지진의 모든 곳을 파괴해버렸다. 다시는 자신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대포를 파괴하거나 바다에 버렸다. 초지진을 함락한 미군은 덕진진에 이어 광성보에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함락했다. 그런데도 협상에 응하지 않으려는 조선의 태도에 아무 소득도 없이 되돌아갔다.
 
미군이 물러난 이후 초지진이 복구되었으나, 예전만도 못한 복구였다. 그런 가운데 1875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첫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운요호 사건을 초지진에서 벌였다. 조선의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들어온 운요호는 작은 배를 내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초지진에 접근했다. 당연히 초지진에 있는 조선군은 되돌아갈 것을 경고했다. 명백히 불법적인 주권침해였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군이 대포를 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초지진에는 사정거리가 700m에 불과한 대포만이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사정거리가 긴 서양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포격으로 초지진은 또다시 무너져내렸다.

이후 일본군은 영종도에 상륙하여 살육과 노략질하며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했다. 곧이어 대규모의 군함과 병력을 보내며 조선을 위협했다. 조선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며 개항으로 정책변경을 고려하고 있었기에,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이자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이 맺었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조선은 아픔만을 남긴 채 멸망하고 말았다.


 초지진도 그러했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초지진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더는 한강을 지키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된 초지진에는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을 축성하며 심었다고 전해지는 두 그루의 소나무만 남았다. 미군과 일본군이 쏜 포화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묵묵히 초지진 터를 지켰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초지진은 사라져갔다.
 
멸망했던 우리 민족이 다시 광복을 맞이하듯, 1973년 초지진도 부활했다. 물론 완벽한 복원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 초지돈·장자평돈·섬암돈을 포함하던 모습이 아닌 초지돈대만이 복원되었다. 그렇다 보니 광성보에 비해 규모가 작은데도 진이라 불리는 이유를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초지진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비중을 느끼기도 힘들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을 찾자면, 초지진 안에 있는 홍이포가 진품이란 사실이다. 강화도의 다른 장소에 있는 모조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홍이포로 완벽하게 복원되지 않은 초지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초지진을 방문하게 된다면 외세에 맞서 싸웠던 격전지였음을 보여주는 두 그루의 소나무와 홍이포는 꼭 봐야 한다. 특히 소나무의 경우 폭탄을 맞은 자리를 찾아보자.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파편으로 깨진 성벽도 찾아본다면, 초지진을 방문한 것이 후회되지 않을 것이다. 꼭 오래도록 보존된 유물만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유적과 유물을 통해 만나려고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의 얼이다. 비록 초라해진 초지진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대대로 지키고 물려주고자 했던 얼, 정신을 만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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