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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31. 2020

죽어서도 경주를 밟지 못한 경순왕



역사적으로 영원히 존속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은 수백 년을 주기로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수많은 나라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천년을 이어온 신라는 많은 이의 사랑도 받았지만, 아쉬움과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978)은 자신의 힘으로 역사를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겼다. 그로 인해 자식들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원망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경순왕은 죽은 뒤에도 경주에 돌아가지 못하고 연천에 머물러있다.


경순왕릉은 연천에서도 외곽인 고랑포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 이곳은 삼국시대 요충지로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통일 신라 이후로는 임진강을 통한 인근 지역의 물자교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에는 이곳에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들어올 정도로 발전하였지만, 분단과 전쟁으로 오늘날 크게 쇠퇴하였다. 그나마 최근 고랑포구 역사공원이 들어서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지만, 얼마 전까지 고랑포구 옆에 위치한 경순왕릉은 사람이 방문하지 않아 한산하기만 했다. 심지어 경순왕릉 입구에 들어서며 보이는 ‘지뢰 조심’이란 푯말은 오히려 이곳이 분단의 현장임을 느끼게 한다.

경순왕릉이 경주가 아닌 지역에 존재하는 신라의 유일한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잊혀왔다. 아니 잊혀야만 했다. 경순왕이 죽은 978년, 사람들의 마음에 신라는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지역은 더욱 그러했다. 신라가 멸망한 지 43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경순왕의 죽음은 신라의 부흥을 충분히 자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경주로 가던 길목에 있던 연천에 능이 조성되었다.



이후 조선 영조 때 김성운이 경순왕릉 비를 발견하면서 경순왕릉은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영조는 경순왕릉에 석조물을 조성하며 신라 마지막 왕릉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과정에서 경순왕릉은 훼손되었다. 얼마나 심하게 훼손되었는지 경순왕릉 비문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일까? 경순왕릉에 있는 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보다는 사람의 얼굴 형상이 나타난다.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경순왕릉 앞에 너른 풀밭이 있지만, 철조망과 나무들에 가로막혀있어 오히려 답답함이 느껴진다. 마치 경순왕이 대접을 받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오묘함처럼 말이다. 사실 경순왕은 왕이 될 마음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후백제의 잦은 침략으로 신라의 국운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경애왕(재위 924~927)이 견훤에게 죽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운명을 거부할 힘이 경순왕에게 있지 못했다. 경애왕의 이종사촌이라는 이유로 견훤에게 추대받아 제56대 왕으로 즉위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왕이 되었으나, 신라를 강성하게 만들 힘이 그에겐 없었다. 여전히 후백제는 신라를 자주 침략하며 위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고려가 신라에 우호적으로 접근해왔다는 점이다. 경순왕은 견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왕처럼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어했다. 더불어 후백제가 진주와 합천을 침략하며 신라를 압박할수록, 관료와 백성들은 고려로 투항했다.
 


경순왕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후백제의 매서운 침략을 막을 힘은 없는데, 관료와 백성들은 신라를 버리고 고려와 후백제로 넘어가고 있다. 신하들은 어려움을 헤쳐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에만 급급해한다. 이 상황에서 과연 신라는 존속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라에 희망은 없었다. 버티면 버틸수록 경순왕 자신을 포함한 신라의 모든 사람이 곤경에 빠질 것이 뻔했다.
 
그런 와중에 후백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견훤의 후계자 선정에 불만을 품은 큰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아들에 의해 금산사로 유폐된 견훤은 후백제를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의탁했다. 후백제가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신라의 멸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것은 천년 사직을 지키면서 백성이 피해 보지 않고 신라를 마무리 짓느냐였다.

그러나 천년을 이어온 신라를 고려에 넘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 스스로 망국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고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역시나 항복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고려 투항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많은 신하가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자신의 큰아들 마의태자마저도 크게 반대했다.
 


하지만 경순왕은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문무백관과 함께 935년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출발했다. 30리(약 12km)에 달한 행렬을 끌고 가던 경순왕은 이것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개경에 도착한 경순왕은 유화궁에 머무르며 왕건의 딸 안정숙의공주와 결혼하며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는 혼인을 통해 경순왕을 묶어두려는 왕건의 정책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왕건의 다른 딸하고도 혼인했다.

고려에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정승공에 봉해지며 1천 석의 녹봉을 받았다. 그리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관리하는 사심관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정승공에 봉해지고, 1천 석의 녹봉 그리고 경주를 관리하는 사심관은 허울 좋은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태자보다 높은 정승공이지만 아무런 실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1천 석의 녹봉과 경주 식읍이 많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신라 왕의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경주의 부호장 이하를 관리하는 사심관이 되었지만, 책임만 주어진 자리였다.

이런 경순왕을 탓하며 떠나는 이가 속출했다. 자식이던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갔고, 막내는 범공(梵空)이란 불명으로 승려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비참하고 굴욕적이었지만 경순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수했다. 더 나아가 신라를 부흥시킬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신라의 3대 보물이던 성제대(聖帝帶-허리띠)를 왕건에게 바쳤다.
 


그럼에도 경순왕은 마음 편한 날 없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왕건이 죽은 뒤 혜종, 정종, 광종에 이르기까지 왕좌를 둔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경순왕은 매 순간 조심해야 했다. 훗날 자신의 딸이 경종의 아내가 되었지만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광종의 뒤를 이은 경종은 왕권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천년 사직을 보호하고, 무고한 백성을 죽일 수 없어 나라를 바친 경순왕은 죽는 순간까지 불안감에 마음을 졸여야 했을 것이다. 자식들도 자신을 비난하는 상황에서 선왕들을 뵐 면목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경순왕은 하늘을 마음껏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경순왕릉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유독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경순왕이 생소한 이들에게 경순왕릉은 여행지로서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고랑포구 역사공원이 설립되면서 경순왕릉을 방문할 이유가 생겼다. 특히 자녀를 둔 부모에겐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기존의 박물관과는 달리 활쏘기, 총쏘기, 패러글라이딩 등 가상현실 체험으로 연천의 과거와 현재를 재미있게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아이들이 박물관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모습에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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