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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07. 2020

독립운동은 진행 중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



경기도 화성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3·1운동 당시 일제가 얼마나 끔찍하게 탄압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인 제암리 학살사건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제암리 학살이 일어났던 이곳을 방문한 이가 얼마나 될까? 솔직히 물어보기가 두렵다. 우선 나부터도 이곳을 방문한 것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39번 국도를 따라 화성 부근을 달리다 보면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알리는 이정표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 바쁜지 운전대를 돌려 제암리로 향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제암리를 목적으로 간 적이 없다. 좋게 포장하면 가슴 아픈 장소를 방문하기 두려워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핑계일 뿐이다. 주변 인근을 살펴보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싶다. 많은 사람이 찾는다면 인근에 상점이나 음식점이라도 있을 텐데, 제암리 기념관 근처에서 찾기 어렵다. 다르게 생각하면 난잡한 모습을 보지 않고 경건함을 가진 채 방문할 수 있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암리 순국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어진다. 길목을 가득 채운 태극기와 현수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움이 벅차오른다. 태극기와 ‘NO’, ‘100년 전 3·1운동 정신 이어받아 경제보복 이겨내자.’라는 현수막은 훌륭한 선조를 둔 제암리 주민들의 자부심을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제암리 사건이 없었다면 이런 모습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서면 공원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는 무료 주차장이 갖추어져 있어 방문객을 환영하는 제암리 주민들의 배려도 느껴진다. 중앙에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제암리 교회가 있던 자리로, 1919년 제암리 주민이 학살된 사건이 벌어진 끔찍한 장소다. 왜 일제는 이곳에서 제암리 주민을 죽여야만 했을까?


3·1운동은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으로 계속 확산하였다. 지방으로 만세시위가 확산할수록 참여 인원이 많아지고, 형태도 과격해졌다. 이는 농촌 지역이 식민지 착취와 탄압에 더 많이 노출되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가슴속에 독립을 향한 마음이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3월 31일 화성 발안 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도 매우 거셌다.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 집에 시민들은 돌을 던졌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재소(현재의 지구대)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며 돌을 던졌다. 일제 군경은 이에 맞서 군중에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4월 3일에는 화성 화수리에서 일본 순사가 살해당하며, 시위가 격화됐다. 이에 일제는 만세시위가 확산하는 것을 막고자, 가옥을 불 지르고 시위 주동자를 잡아들였다. 하지만 제암리 지역의 인물들은 검거되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제암리와 고주리를 요주 지역으로 생각하고, 잔혹성을 보여줄 본보기로 삼았다.

4월 15일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부대는 제암리에 살았던 조회창과 정미소를 운영하던 사사카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들어섰다. 제암리에 있는 성인 남성을 모두 죽이고자 아리타는 순사 1명과 보병 2명을 반대쪽으로 보내 퇴각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성인 남성을 모두 교회에 모이도록 하였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제암리 남자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총길이보다 작은 아이들은 돌려보내고, 성인은 이름을 확인하며 누락된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교회 문을 걸어 잠그고 총을 난사했다. 이 과정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끝까지 쫓아온 일제 군경에게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유일하게 조경태만이 산으로 도망가 살아남았다.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을 주민을 학살하며 가옥에 불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교회에 불이 난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던 홍원식의 아내가 총에 맞아 죽었고, 남편의 죽음에 울부짖던 강태성의 아내는 그 자리에서 목이 베어졌다. 제암리의 주민을 학살한 일제는 고주리로 몰려가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제암리에서 23명(남자 21명, 여자 2명), 고주리에서 6명이 희생되었다.
 
분명 고의적으로 선량한 한국인을 학살했던 이 사건을 일제는 “제암리에 도착하자마자 순사보(조회창)를 시켜 천도교도 및 기독교도 25명을 기독교회당에 집하시키고 전번의 소요 및 장래의 각오에 관해 2, 3개 질문을 던졌다. 그 사이 1명이 도망가려고 해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한 명과 같이 치고 박다가 즉시 베어버렸다. 이 상황을 본 조선인 전부는 폭행의 태도를 보였고 일부는 목관 또는 의자 등을 가지고 반항을 했다. (아리타 중위는) 즉시 나와 병졸에게 사격을 명해 거의 전부를 사살하기에 이르렀다. 이 혼란 중 서쪽 인가에서 불을 지폈고 강풍에 의해 즉시 교회당이 연소했고 끝내는 20여 가구를 소실하기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했다.

일제는 제암리 학살을 영원히 감추고자 했으나 곧 세상에 알려졌다. 언더우드는 참사현장을 보고서로 미국에 알렸고, 스코필드 박사는 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래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상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고마움으로 순국기념팀 오른편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분들 외에도 커티스, 테일러 등 재한 공관, 기자, 선교사들의 항의가 계속 이어지자 총독은 직접 4월 20일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고, 복구비로 1,500원을 내놓았다. 조선군사령부에서도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9년 8월 21일 아리타 중위는 명령의 오해에서 나온 정당한 폭동진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이로써 학살사건을 무마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4월 15일의 끔찍한 순간을 기억했다. 고주리 학살사건 목격자였던 김시열은 “토막토막 난도질을 한 후 불을 놓아 시체를 구별할 수 없게끔 만들었어.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라고 증언했다. 제암리 학살의 목격자 전동례는 “밤중쯤 되니께 좌판이 하구 일본 사람 댓 데리구 들어오더니 이렇게 나와 죽은 사람을 죄 창으로 찔러서 그렇게 해유, 죽은 사람을. 죽은 거를 거 무슨 죄로 창으로 찔러서 창자가 흐르게 해유.”


하지만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던 제암리 주민들의 유해는 아주 오랫동안 수습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전동례 씨의 증언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는 1982년이 되어서야 유해가 수습되었다. 순국기념탑 뒤로 보이는 낮은 야산 중턱에 23위 유해와 희생자들의 유품을 모아 합동 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문화공보부와 경기도는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이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다.

23위 묘 아래에는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화성시 3·1운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안내되어있다. 무엇보다도 화성 지역 독립운동가에 대한 설명은 인상적이다. 제암리 기념관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를 만났음에 특별함을 느끼며 감사함이 느껴진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면, 저절로 애향심과 애국심을 크게 고무된다. 그제서야 제암리 기념관으로 들어올 때 보였던 태극기와 현수막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제암리 기념관의 조문기(1926~2008) 선생님의 어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만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를, 그리고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과거사 청산은 친일파 청산부터 첫발을 내디뎌야 하고,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글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선조들이 희생을 치르면서 만든 대한민국인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임승차하면서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이라도 가져봤는지를 생각해보니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조문기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을지를 생각하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명백해진다. 제암리 순국기념관은 과거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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