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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5. 2020

안양사에서 안양이 나오다.



안양은 남쪽에서 서울로 들어서는 길목에 위치한 큰 도시다. 많은 사람이 매일 아침 분주하게 이동한다. 도심지에는 높은 빌딩과 상업시설로 이루어진 번화가를 쉽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안양이란 도시가 이토록 커지고 발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안양이란 행정구역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불과 50여년 전이다. 물론 1905년 경부선 철도에 안양역이 생긴 것으로 계산하면 대략 100여년 전에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
 
안양이란 명칭은 1941년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면서 등장했다. 해방 후인 49년에 안양읍으로 승격된 뒤 빠른 속도로 주변 지역을 흡수하며 커졌다. 그리고 1973년에 시로 승격하여, 2018년 기준으로 55만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안양이란 명칭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않다.
 



안양이란 명칭은 안양예술공원에 있었던 안양사라는 사찰에서 유래한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극락정토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근심걱정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부처님에게 기도하던 마음이 도시 이름에 담겨있다. 종교를 떠나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한 안양이란 명칭은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그런데 안양예술공원에 가면 안양박물관 자리에 있는 안양사터와 1960년대 대인(大仁) 비구니가 세운 안양사 두 곳이 있다. 안양사 터와 지금의 안양사 모두에 옛 유물이 있어 함께 방문해야 온전하게 안양사를 봤다고 말할 수 있다. 안양사 터와 안양사까지 걸어서 10여분 거리로 멀지 않으니 모두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안양박물관에 있는 안양사 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3층 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당간지주란 불화가 그려진 기를 걸어두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기둥을 말한다. 큰 돌로 만들어져 훼손되지 않고, 이곳에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높이가 3.8m의 거대한 당간지주는 이곳에 있던 안양사가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중기에 안양사가 사라졌기에 정확하게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당간지주와 안양박물관 내 사찰의 터를 보면 매우 큰 사찰이었음 알 수 있다. 더욱이 이곳의 당간지주는 사찰의 이름과 조성시기, 그리고 참여 명단이 기록되어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야외에서 가까이 볼 수 있는 것 또한 큰 행운이라 하겠다.
  



당간지주 옆으로 3층석탑이 보인다. 당간지주와 함께 오랜 세월 풍파를 이겨냈음을 보여주듯 여기저기 닳은 흔적이 보인다.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탑의 모습에서 조선시대 이후 사찰이 많은 억압과 탄압을 받았음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삼층석탑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었다. 안양사가 사라진 이후 버려졌던 삼층석탑은 1960년대 공장이 설립되면서 당간지주 옆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런데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안내하는 표지판에는 안양사지라는 말 대신 ‘중초사지 당간지주’, ‘중초사지 삼층석탑’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안양사의 창건 설화와 조금은 맞지 않는다. 안양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다. 왕건이 지금의 과천과 시흥을 정벌하러 가는 도중 삼성산(안양사 뒤쪽에 있는 산) 꼭대기에 오색 빛이 서려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왕건이 삼성산에 걸려있는 구름까지 오르자 한 스님이 정좌하고 있었다.

왕건이 만난 스님은 능정스님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왕건은 능정 스님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뜻이 통했고, 그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는 듯했다. 그리하여 왕건은 능정 스님에게 많은 재화를 내려 사찰을 짓게 하였다. 그렇게 창건된 사찰이 바로 안양사이다.
 


그러나 당간지주와 3층석탑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안양사 이전에 증초사라 불리던 사찰이 이미 있었다.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중초사 건립되었다가 왕건에 의해 900년경 재건되었거나, 중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에 의해 설립된 안양사는 왕실의 보호와 지원을 받아 크게 번창했고, 왕권 강화에 힘썼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문종의 아들이면서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이 안양사를 찾아와 능정의 진영(영정)에 참배하고 조사당(사찰을 창건한 사람을 위한 건축물)에서 경전을 읽었다는 기록도 안양사가 고려 왕실과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의천은 문종의 아들로 천태종을 창시하여 고려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도 안양사를 찾아와 탑명을 지으며 왕실의 번영을 기원할 정도로 안양사는 발전하였으나 무신 집권기 이후 쇠락해져 갔다. 최충헌은 무신들의 투쟁을 끝내고 4대 60년 동안 권력을 횡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왕실을 무시하는 최충헌의 행동을 많은 이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바로잡고자 했다. 안양사의 승려들도 왕실을 바로세우기 위해 인근 흥왕사와 왕륜사 승려를 모아 최충헌을 죽이려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천여명의 승려가 모여 법회를 열 정도로 큰 안양사가 쇠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최영이 1381년 안양사에 7층 석탑을 중수했다는 기록에서 잠시나마 중흥을 이루는 듯 보였으나, 쇠락은 멈추진 않았다. 결국 억불정책을 펴던 조선시대 안양사는 16세기 중반 문을 닫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해방 이후 사라진 안양사의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섰다. 유유산업은 유한양행을 창립한 유일한 박사가 친족 경영을 막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기업이다. 유일한의 동생 유특한이 독립하여 세운 유유산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 김중업에게 의뢰하여 공장을 지었다. 그래서 현재 안양사 터는 옛 안양사의 흔적과 안양박물관 그리고 김중업 박물관이 공존하고 있다. 또한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사라져가는 문자들의 정원>이란 이름으로 작품이 만들어져 있다. 이로서 하나의 공간에서 여러 시간을 마주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자리하게 되었다.
 



옛 안양사 터를 나와 산 중턱에 있는 안양사를 가는 길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석수동 마애종을 만날 수 있다. 마애종이 있는 곳은 커다란 암석을 뒤로 지붕과 네 개의 기둥만 있는 작은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축물 뒤로 커다란 바위에 승려가 종을 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 새겨진 문자나 그림을 마애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종이 새겨져 있어 마애종이라 부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위에 새겨진 종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종의 소리를 멀리까지 들릴 수 있도록 용의 형태로 만들어진 음통에서부터 종에 새겨진 무늬까지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마애종도 안양사처럼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애종을 거쳐 안양사로 도착하면 여러 꽃들이 활짝 만개해있다. 스님들이 사찰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안양사의 대웅전으로 오르는 작은 오르막길 옆으로 보이는 여러 꽃과 숨겨진 작은 조형물은 눈을 즐겁게한다. 짧은 오르막을 오르면 귀부와 부도가 나타난다. 귀부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김부식의 글이 적인 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비신(碑身)과 이수(螭首)가 소실되어 귀부만이 남아있다. 이 귀부도 원래는 이곳에 자리한 것이 아니지만, 이곳에서 안양사의 명맥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양사가 있는 안양예술공원은 늘 등산객과 가족 그리고 연인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시원한 냇가를 중심으로 조각공원과 전망대 그리고 음식점과 카페 등 상점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공영주차장도 잘 갖추어져, 편의성이 뛰어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안양이란 지명이 나온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안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안양사가 더 널리 알려진다면 안양 시민의 애향심도 커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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