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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29. 2020

누구나 사랑하는 그녀


일제의 수탈과 억압으로 힘들어하던 시기 심훈은 우리 민족에게 힘든 상황을 극복하여, 더 나은 삶을 꿈꾸게 해주는 소설 ‘상록수’를 썼다. 이 소설은 브나로드 운동을 통해 농촌계몽을 이끌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또한 지금까지도 ‘상록수’는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
 
소설 ‘상록수’는 청석골과 한곡리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채영신과 박동혁으로부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어려운 여건에 굴하지 않고 농촌계몽에 힘을 쏟았다. 채영신은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을 위해 야학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과로와 맹장염으로 쓰러진다. 이 소식을 들은 박동혁이 채영신을 간호하고 마을로 돌아오니 강기천이 청년회관을 빼앗고 있었다.

박동혁의 동생인 동화는 청년회관이 빼앗기는 것에 화를 참지 못하고 불을 지른 뒤, 만주로 도망갔다. 이로 인해 박동혁은 감옥에 수감되고 만다. 출소 후 자신을 그리워하다 병약해져 죽은 채영신의 장례를 치른 박동혁은 그녀의 몫까지 농촌계몽운동을 매진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소설을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안산에서 농촌 계몽운동에 전념했던 최용신(1909~1935)을 모델로 삼았다. 최용신은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서 정강이까지 얽음(천연두로 생긴 흉터)이 있었다. 그러나 외모로 위축되기는커녕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밝히는 당찬 아이였다.
 
최용신은 신간회 덕원군지부 부회장을 역임했던 아버지를 둔 덕택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두남학교를 시작으로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까지 학업을 마친 채용신은 아주 영특하기로 유명했다. 당시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20년 동안 수업을 했던 전희균 목사는 훗날 “용신 양은 루씨학교 재학 중에 성서 시험에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만점을 받았는데, 이 같은 예를 보지 못하였다.”라고 회상했다. 또한 의지도 확고했다. 아직은 어린 나이였던 최용신은 졸업 후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늘 이야기했다.


최용신이 열정적으로 생활하던 모습은 많은 이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런 최용신에게 세 살 어린 김학준(1912~1975)은 사랑에 빠졌다. 김학준은 최용신에게 청혼을 했지만, 농촌계몽에 평생을 바치기로 했다는 말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최용신에게 끊임없이 농촌계몽을 함께하며 사랑할 수 있다는 김학준의 고백은 최용신의 마음을 흔들었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 둘은 김학준의 문벌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가족을 설득했다. 그리고 약혼을 얻어낸 둘은 농촌계몽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잠시 이별하기로 한다. 최용신은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고, 김학준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래를 위한 희망을 안고 미래를 준비하러 간 둘이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협신신학교에 입학한 최용신은 조선YMCA 연합회 농촌부 간부이자, 3·1운동 때 만세를 부르다 투옥된 이력이 있는 황에스더를 만나게 된다. 애국계몽 운동가 황에스더와의 만남은 최용신의 농촌계몽에 대한 의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1929년 황해도 수안군 용현리로 떠났던 봉사활동은 최용신에게 농촌계몽을 위해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남겨주었다.
 


1931년 개학을 앞두고 교장과 몇몇 교수들의 부당한 행동에 규탄하는 시위 주동자로 징계를 받게 된 최용신은 학교를 그만둔다. 학교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농촌계몽 활동에 직접 참여하기 위한 마음이 컸다. 최용신은 당시 수원군 반월면 샘골(지금의 안산지역)에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내려갔다.
 
최용신은 1932년 5월 샘골의 천곡학원을 교육기관으로 인가받고, 아이를 비롯하여 청년과 부녀자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오전, 오후, 야간반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최용신은 한글을 포함한 산수 등 기초교육과 실생활에 필요한 재봉, 수예, 가사 등을 가르쳤다. 천곡학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최용신은 학교 업무만으로도 벅찰 상황에서 감나무 등 유실수를 주민에게 나누어주는 등 마을의 생활개선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냉소적이던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최용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도와주고자 하였다. 학교 근처 솔밭의 주인이던 박용덕은 1,500평의 땅을 기증하기도 했다. 재산이 없는 주민들은 기쁜 마음으로 학교 짓는 일에 참여했다. 점차 샘골 지역의 사람들 의식과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최용신은 오히려 갈증이 났다.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서 장기적이면서 획기적인 농촌계몽이 필요했다. 천곡만이 아니라 더 많은 농촌에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역량을 키우기 위한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간 지 세 달 만에 최용신은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비타민B가 부족해 걸리는 각기병이었다. 실질적으로 고된 노동에 부실한 식사로 몸이 견뎌내지 못하며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었다.
 


귀국 후 천곡으로 돌아온 최용신은 주민들의 지극정성 간호로 병세가 점차 호전되었다. 거동이 가능해진 최용신은 불편한 몸이지만,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며 농촌계몽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1934년 YWCA의 지원이 끊겨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딪히자, 최용신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수원도립병원에서 수술을 마친 채용신의 회복을 많은 이들이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용신의 나이 26살로 매서운 바람이 불던 1935년 1월 23일이었다.
 
최용신의 장례는 샘골 지방의 사회장으로 이루어졌다. 아이 200여 명을 포함하여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애도하였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관을 붙들고 “나는 선생님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보고 싶어요.”, “거머리에 물리면서도 우리 논에 와서 모를 심어주시던 선생님이….”라며 오열하였다. 아이들의 울음에 어른들도 따라 울자 하관식이 진행되지 못했다. 결국 아이들을 억지로 관에서 떼어놓고서야 장례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최용신의 죽음은 샘골에서만의 애통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썩은 한 개의 밀알, 브나로드의 선구자, 고 최용신 양의 일생, 인테리 여성들아! 여기에 한 번 눈을 던져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잡기 <신가정>에는 “영원불멸의 명조, 고 최용신 양의 밟아온 업적의 길, 천곡학원을 찾아서.”를 기재했다. 이 외에도 많은 언론에서 최용신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글을 실었다. 이 중에서도 최용신의 삶을 가장 널리 알린 것이 심훈의 <상록수>다.

현재 최용신의 묘는 경기도 안산 상록수역에서 멀지 않은 상록수 공원 내에 있다. 이곳은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많은 어머니들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즐겨 방문하고 있다. 어머니들이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공원에서 소리 내며 즐겁게 뛰어다닌다. 넓지 않은 공원이지만 주차공간과 큰 화장실이 갖추어져 편의성을 갖추고 있다. 단 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일방통행이어서 초행길이라면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상록수 공원이 특별한 것은 최용신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념관에는 여러 기록과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 사는 현지인들은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역사를 접하게 된다. 외지인에게는 이곳을 방문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주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은 동네 공원이면서, 상록수의 배경이 되는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상록수 공원을 방문하고 나오면서 두 개의 생각을 했다. 첫 번째는 최용신 옆에 누워있는 약혼자 김학준의 묘이다. 최용신이 죽은 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김학준이 이곳에 누워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학준과 최용신의 사랑을 대단하다고 이야기해야 할지, 유가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죽은 뒤 첫사랑 옆에 눕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가, 곧 후회했다. 괜히 물어봤구나.
 




수많은 젊은이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 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한다. 이들의 모습이 기억되기도 하지만, 잊히는 사람도 많다. 최용신의 정신과 업적을 보면, 그녀를 기억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또 다른 최용신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기억되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착잡함도 밀려온다. 그래도 최용신이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도 좋다. 최용신이 소설 채영신으로 다시 태어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토록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여인이 또 있을까? 그녀가 심어놓은 향나무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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