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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17. 2020

울릉도 공항은 영토수호다.



2025년 울릉도에 공항이 개항된다는 반가운 뉴스가 들렸다. 비행기로 1시간이면 울릉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40여만 명이 방문하는 울릉도는 화산섬으로 도둑공해뱀이 없고 물미인바람향나무가 많다 하여 35다라 불린다. 하지만 비바람 그리고 안개 등으로 1년에 100일 정도는 배가 출항하지 못하는 교통 불모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혹시라도 모를 결항이 두려워 울릉도 여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편입된 역사는 오래되었다.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이 왜와 연합하여 영역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신라는 이사부에게 정복을 명했다. 이 해가 512년이다. 이사부가 울릉도에 배를 정박하지 못하고 고전을 겪자,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우산국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사자를 보고 겁을 먹고 항복했다. 그러나 신라군이 울릉도에 정박하자 이내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우해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벗어 던진 투구는 바위로 변했다. 또한 이사부가 만든 나무 사자도 바위가 되었다. 그래서 울릉도에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투구 바위와 사자바위가 있다.


고려 시대도 울릉도는 우리의 영토였다. 태조 13년에 울릉도에서 토산물을 갖다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의종 때는 김유립을 보내어 울릉도를 중앙에서 관리하고자 하는 노력도 보였다. 그러나 현종 9년 여진족이 울릉도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면서 많은 사람이 섬을 빠져나왔다. 그 이후로도 여진족의 침략이 계속 이어지고,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울릉도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는 울릉도에서 생명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의 군사력에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이 확연하게 줄었다. 이제 울릉도는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 기회의 섬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울릉도로 사람들이 터전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풍족하고 행복한 삶이 펼쳐질 것이란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태종이 백성의 안전을 위해 섬에 살던 사람들을 두 번이나 뭍으로 불러들였다. 세종도 태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세 번에 걸쳐 울릉도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면서 울릉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300년 가까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변해버린 울릉도는 일본인이 차지했다. 삼림자원과 해산물이 풍부한데 사람이 살지 않는 울릉도는 일본 어민에게 매력적이었다. 이들은 울릉도를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며, 물고기를 잡으러 오는 조선인을 때리며 쫓아냈다. 그러던 중 1696년 평민 또는 사노비로 추정되는 안용복이 생계를 위해 울릉도로 40여 명의 사람들과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하지만 그물을 내리기도 전에 일본 어부들과 다툼이 일었다.
 
수적으로 밀린 안용복은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보통 사람의 경우 싸움에 져서 끌려가면 두려움에 목숨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러나 안용복은 오히려 일본 호기 주 태수에게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조선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일본 태수는 안용복의 요구에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문서를 써주며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9개월 만의 귀국이었지만, 안용복에게 돌아온 것은 곤장이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50, 부산 왜관에서 40일 넘게 억류되었을 때, 곤장을 맞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동래부사는 일본에 건너간 죄를 물어 안용복과 박어둔에게 곤장 100대와 80대를 때렸다. 하지만 안용복이 일본에 갔다 온 소식에 조정은 울릉도에 관심을 가졌다. 1694년 정권을 잡은 소론은 일본인들의 울릉도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섬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 행정적인 명령에 그치지 않고 삼척첨사 장한상을 보내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하여 보고토록 했다. 그리고 일본 막부를 대행한 대마도와 논의를 벌여 1696년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았다. 더불어 일본 어민들의 도해와 어업 활동을 금지했다.

하지만 대마도가 에도 막부에 울릉도 도해 금지 문서를 넘기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화가 난 안용복은 무관으로 변복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진 <조선팔도지도>를 준비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어민 160여 명을 태운 32척의 배로 울릉도에 가서 일본 어민을 내쫓은 뒤,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쓰인 깃발을 배에 걸고 일본 호키 주를 찾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대마도주는 겁이 났다. 모든 책임이 자신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예감한 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이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막부에 전했다. 지금까지의 관행을 어기고 직접 막부를 찾은 것을 문제 삼았다. 에도 막부는 대마도주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안용복과 그 일행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조선 조정은 안용복이 관리로 사칭하여 일본으로 넘어간 사실을 큰 문제로 삼았다. 특히 노론은 쇄국정책을 펴던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넘어간 것도 큰일인데, 왕의 사절단으로 사칭한 것은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론은 생각이 달랐다. 안용복이 있었기에 울릉도와 독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봤다. 영토를 되찾는 공로를 참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사형을 주장하던 노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유배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후의 안용복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후대에 성호 이익은 안용복을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끝내고, 토지를 회복한 영웅호걸로 평가했다. 이런 그에게 포상은커녕 처벌을 내린 일을 애통하게 생각했다.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다. 그런데 더 아쉬운 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적힌 문서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만 남아있더라도 지금처럼 일본이 죽도라 부르며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2025년이 기대된다. 지금보다 많은 사람이 공항을 통해 울릉도를 손쉽게 방문할 것이다. 독도에도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하여 우리의 영토라는 사실을 세계에 보여줄 것이다. 무엇보다 울릉도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교통이 원활해지면 울릉도 현지인들이 언제든 편안하게 뭍의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지역경제도 활성화되어 울릉도 주민의 감소를 막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울릉도의 공항은 단순한 편의 시설 확충이 아니다. 우리 영토를 지키는 중요한 일이다. 조심스럽게 공항 이름에 안용복이 들어가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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