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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02. 2020

하늘이 금척을 내리다


출처 : https://blog.naver.com/jinan-gun/221381478175

금으로 만들어진 자, 줄여서 금척(金尺)이라 불리는 신물의 역사는 신라 건국으로 올라간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꿈에서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 신인은 금척을 주면서 “이것은 왕의 증표이니 길이 자손에게 전하라. 백성 가운데 아픈 이가 있으면 이 자로 재어 치료하라.”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신라 왕실은 금척을 고이 간직했고, 대내외적으로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왕이라는 명분을 얻었다. 이 당시는 제정일치 사회로 왕은 세속적 지배자면서 종교적 지도자였기에 하늘을 상징하는 금척은 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신물이었다. 더욱이 백성이 아프면 하늘을 대신해 치료해준다고 하니, 금척을 가진 왕이야말로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의 가지고 있던 종교적 역할이 약해지다가 종내에는 사라진다. 백성들은 금척이 진짜로 있는지, 있다면 정말 병을 고치는 신물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은 금척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전설을 따라가 보면 아픈 사람도 낫게 하는 신물, 금척이 당나라 황제의 귀까지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는 신라에서 금척을 뺏어온다면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통치한다는 명분과 민심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신라왕에게 금척을 바치라고 협박했다. 신라의 왕은 당나라보다 힘이 약해 금척을 지킬 수 없는 현실을 한탄했다. 그렇다고 박혁거세부터 이어져 오던 신물을 순순히 당에 넘길 수도 없었다. 이것은 선조에 대한 불효이면서 신라의 존재 여부를 뒤흔들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jw1405/220836751702

신라 조정은 긴 논의 결과 금척의 존재를 당이 알지 못하도록 숨기기로 하였다. 다음날부터 백성들을 동원하여 40여 개의 고분을 만든 뒤, 하나의 고분에 아무도 모르게 금척을 숨겼다. 신라의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관을 넣는 나무 덧널 위를 돌과 흙으로 덮는 양식이다. 고분의 크기가 작은 동산을 연상할 정도로 크고, 고분의 개수가 많다 보니 당황제도 금척 찾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신라마저도 금척을 숨겨놓은 고분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금척은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단지 이곳에 있을 거로 추측할 뿐이었다. 이곳이 어디냐? 바로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금척리 고분군이다. 이곳에 있는 수십 개의 고분 중에 하나에 금척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래도 옛 전설이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신라의 금척에 관한 이야기는 신라가 망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금척을 찾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성계의 금척 설화다. 이성계가 고려 장수로 운봉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길에 마이산 옆을 지날 때의 일이다. 마이산을 마주하는 순간 이성계는 젊은 날 신인이 꿈속에 나타나 건네준 금척과 산의 모습이 너무나 흡사한 것에 매우 놀랐다. 그리고 마이산을 마주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에게 주는 계시라 생각했다.
 
이성계는 군대의 진군을 멈추고 마이산의 은수사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부처님과 자신에게 물어봤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고민한 이성계는 고려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늘이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라고 말해주는 것을 모른 체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전쟁과 기아로 힘들어하는 백성을 위해서라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고려를 버려야 했다. 다른 국가가 감히 건들 수 없는 강대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소명이라고 믿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seong9038/221335348608

이때의 고뇌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태조 이성계는 기도 중에 마신 물이 너무도 달콤했다. 자신의 번뇌를 다 씻어주는 듯했다. 다시 한번 마셨던 물을 쳐다보니 은같이 맑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성계가 은같이 맑은 물을 마신 장소라며 사찰 이름을 은수사로 불렀다. 은수사가 있는 산도 고려 시대 용출산에서 금척을 묶어놓은 것 같다는 의미의 속금산으로 불렀다. 훗날 태종이 말의 귀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이산으로 다시 바꾸기 전까지 말이다. 그래서일까? 은수사에는 기도를 마친 증표로 이성계가 심었다는 청실배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금척을 받는 몽금척수수도와 일월오봉도가 태극전에 모셔져 있다. 진안 홍삼 축제에서도 이를 기려 태조 이성계의 행렬을 재현하는 몽금척 행렬과 궁중무용 몽금척 공연을 연다.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이성계가 금척을 통해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며 선전하며, 건국의 정당성을 이야기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금척을 받는 이성계의 꿈을 칭송하는 악장(樂章) <몽금척>을 만들었다. 태조는 정도전이 올린 <몽금척>을 보자 너무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대한 포상으로 정도전에게 큰 상을 내리고, 악공들에게는 <몽금척> 연주토록 하였다. 이후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태종 이후로 궁중 행사에서 <금척>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되었다. <악학궤범>에도 17명이 역할을 맡아 꿈을 재현하는 <금척>에 대해 자세한 소개가 나와 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cosmopolitan/221405260459

고종황제가 세운 대한제국에서도 금척은 국가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1900년 칙령 제13호로 훈장의 등급을 정할 때, 금척대훈장을 최고 등급으로 정했다. 금척대훈장은 황족과 문무관 중에서 대훈위서성대수장(금척대훈장 한 등급 아래 훈장)을 받은 사람 중에서도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되었다. 금척대훈장을 받는 사람은 600~1,000원의 연금이나 2,000원 이내의 하사금을 함께 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제국은 자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나라가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지로 넘어가는 시기의 허약하디 허약한 나라였다. 조선과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지닌 분들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나라였다. 분명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 행위를 했음에도 대한제국에 가장 큰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리는 이완용, 윤택영 등 매국노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이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분명 고종은 금척대훈장이 이런 인물들에게 주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오늘날 금척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도 생소하여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서 금척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 신라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대의명분이 금척에 있었다. 금척은 우리 민족이 하늘의 자손이자,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즉 천손사상이 담겨있는 소중한 역사이자 문화다.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보여주는 금척이 사라짐으로써, 우리는 중국의 사대 질서에 편입되어야 하는 약속국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만, 중국 당나라의 도움을 받았기에 자주성을 잃어버린 현실 말이다. 그러나 민초들은 자주적이던 옛 모습을 잊지 않았다. 금척을 기억하면서 선조들의 당당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출처 : https://blog.naver.com/jinan-gun/221381478175

고려말에는 원 간섭기에서 벗어나 황제국으로 재도약하고자 했으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오히려 고려의 국운은 기울어져 갔다. 백성들은 황제국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오랜 전란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기만을 기대했다. 그들에게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하며 백성들의 안전을 지켜준 것은 고려의 왕과 권문세족들이 아니었다. 늘 전장에서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민초들을 걱정하던 이성계였다. 민초에게 이성계는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난 신인은 민초가 아니었을까? 신인이 준 금척과 당부의 말은 혼란하고 힘든 현실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달라는 백성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알던 이성계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과 역성혁명을 두고 은수사에서 오랜 시간 고민했고, 마침내 조선 건국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이성계의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이는 평화를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함께 건국 후 요동 정벌을 준비하며 명과 대등한 나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 정신은 500년이 지난 1900년 고종에게 계승됐다. 비록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망국으로 갔지만 말이다.

금척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오늘날 중요하지 않다. 금척은 단지 상상에 불과한 물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금척에 담긴 의미가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중국과 일본은 하늘의 자손이자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며 국가의 위상을 높인다. 우리도 분명 단군을 비롯하여 신라의 박혁거세 등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우며, 우리가 천하의 중심이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금척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자주성도 사라졌다.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심국이 아니라 미・중・일에 눈치 보는 약속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금척을 찾지 못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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