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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06. 2020

황산대첩 설화가 되다.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고려 충정왕 2년(1350)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왜구의 침입은 500회를 넘었다. 왜구는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400여척의 배로 충청, 전라, 경상도를 포함한 전국을 노략질하였다. 당시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닌 일본의 토호가 직접 조정하는 정규 군대의 성격이 더 강하였다.

우왕 6년(1380) 나세와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군은 진포에 주둔하던 왜구의 함선 500여 척을 화포로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왜구는 상주·영동 방향으로 이동하며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특히 상주로 진출하던 왜구는 토벌하러 온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한 500여 명의 고려군을 죽이는 승리로 사기가 매우 높았다. 이들이 남원에 머물며 개경으로 북상하겠다고 위협하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였다.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는 황산(남원에 위치한 산) 북서쪽에서 전투를 벌였다. 산에 먼저 자리를 잡은 왜구가 전투 초반 승기를 잡았으나, 결국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지도력에 패배하게 된다. 이때 전사한 왜구가 흘린 피가 냇물로 흘러들어 인근 주민들이 일주일 가까이 물을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고려군은 왜구로부터 말 1,600필을 포함하여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병기를 거두어들였다.
 
이성계는 불리한 지형에서 10배가 넘는 왜구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왜구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노략질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고, 이성계의 명성과 인기는 고려에서 크게 높아졌다.
 
황산대첩에서의 이성계와 아지발도의 대결은 설화로도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설화에서 아지발도는 15~16세로 추정되는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무예를 갖춘 맹장으로 나온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방언이며, <발도>는 몽골어로 용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아지발도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용감한 소년을 의미한다.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아지발도가 얼마나 무예가 뛰어났는지 수많은 고려 장수가 제대로 칼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사기는 높아졌고, 반대로 고려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이성계는 뛰어난 무예를 가진 아지발도를 사로잡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퉁두란(이지란)이 크게 반대했다. 아지발도의 무예가 너무 뛰어나고 갑옷이 너무 견고하여 고려의 피해가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성계는 퉁두란의 의견을 옳다 여기고, 아지발도를 죽이기 위해 황산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리고 아지발도를 유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상하게도 아지발도는 황산 앞에만 서면 자신의 진지로 돌아갔다. 들리는 말에 ‘황산에서 죽을 수 있다.’고 예언한 누이 때문이라고 했다. 아지발도를 황산으로 끌어들이지 못해, 연이은 패배가 이어지자 이성계는 조급해졌다.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 되지도 않았는데 닭이 울었다. 아지발도는 닭 울음소리에 잠을 깨고 고남산 쪽으로 올라갔다. 이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이성계는 지나가던 할머니를 아지발도에게 보냈다. 아지발도는 전투를 위해 주변 지형을 파악하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할머니를 보았다. 인근 지형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한 아지발도는 할머니에게 황산의 위치를 물었다. 이에 할머니는 이성계가 알려준데로 이 근처에는 황산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황산이 없다는 할머니의 말을 믿은 아지발도가 군대를 이끌고 황산에 오르자, 퉁두란이 활로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췄다. 투구에 활을 맞은 아지발도가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자, 이성계는 쏜살같이 달려가 넘어진 아지발도의 목구멍에 활을 쏘아 죽여버렸다.(또는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었고, 퉁두란이 죽였다고도 한다.) 이 때 아지발도가 흘린 피가 황산다리 아래 바위를 물들이자, 사람들은 피바위라 불렀다. 그리고 아지발도를 죽일 수 있었던 고남산을 태조봉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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