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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24. 2020

사민정책으로 하나가 된 우리인데...



고려말 북쪽으로는 홍건적, 몽골, 여진족의 침입이 연달아 일어났고, 남쪽으로는 왜구에 의해 국토가 유린되었다. 당연히 백성들의 삶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채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고려말 죽은 사람들의 수가 하늘의 별보다 많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고려말의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과전법으로 토지분배가 이루어지면서 국가 체질이 바뀌었다. 가족을 먹여 살릴 토지도 없이 세금을 납부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토지를 소유하고 그 대가로 세금을 납부하면서 조선의 국고는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군역을 질 수 있는 양인이 많아지면서 군사력도 강해졌다.

태조 이성계는 이를 바탕으로 굳건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제일 먼저 가장 위협이 되는 북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함경도는 자신의 선조가 자리 잡은 지역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에 있어 조선의 시작점인 함경도는 꼭 지켜야 할 소중한 영토였다.
 


평안도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쫓은 명나라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최강자였다. 명이 내세우는 중화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국가의 생존에 위협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이 왕래하는 평안도 지역은 여진족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영토였다. 과거 원나라의 사신 저고여가 여진족의 습격으로 죽자, 그 책임을 고려에 물어 쳐들어왔던 역사를 기억하는 조선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원년인 1419년에 무인년(1398)에 공주성을 중수하여 경원부를 설치하고, 도내의 부유한 백성들을 이주시켜 그곳을 세웠다.” 사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태조 때에 공주성을 수리하고 경원부를 설치하여 함경도 주민을 이주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사민 정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태종 때에도 여진족의 침입으로 경성에 소속시켰던 경원부를 옮기는 과정에서 유이민과 안변 이북의 지원자를 합쳐 1,000호를 이주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사민 정책이 시행되었던 이유는 정벌과 진()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고 우리의 영토로 만드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실제로 거주하지 않는 한, 북방 민족의 위협과 침략에 늘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종내에는 우리의 영토로 확고히 굳히기 어려울 수 있었다.
 
실제로 북방지역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땅에 비해 거주하는 인구가 적으면서 공납같이 호()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조세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유발했다. 더욱이 여진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의 잦은 침략은 북쪽 지역에 사는 백성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여기에 높은 산악으로 이루어진 지형은 큰 제약으로 다가왔다. 농경을 기본 토대로 사무역을 금지한 조선에서 살아가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흉년과 사신단의 왕래에 필요한 경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은 버거웠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북방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에 대한 방안이자 북방을 영구히 우리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사민 정책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백성을 자식처럼 어여삐 여기는 세종조차도 사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원성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세종이 4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방식을 따라 함경평안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을 국경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방법으로 사민 정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방법이 한계에 다다르자 세종은 하삼도(충청전라경상) 사람을 함경평안도 남쪽 지역으로 이주시켜 빈자리를 채웠다. 예를 들어 1433년 함경도 남부의 2,200호를 옮겼다는 기록이 이를 보여준다. 그 결과 46진 개척으로 북방이 안정되자, 사민 정책의 방향이 영토회복과 수호에서 농지확보로 변화되었다.

이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오랫동안 거주하던 고향을 떠나 수천 리 떨어진 낯선 환경으로 터전을 옮기는 것을 좋아할 백성은 없었다. 더욱이 비옥한 농토가 있는 따뜻한 지역이 아닌 척박하고 위험이 가득한 지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종도 처음에는 가난한 농민들을 이주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선발대상을 양민으로 확대했다. 이렇게 북쪽으로 강제 이주시킨 인구가 5,658호였다.
 


세조도 사민 대상을 하삼도 백성으로 삼고, 사민의 목적도 개간에 두었다. 더불어 평안황해강원도의 피폐를 줄이기 위해 하삼도의 백성을 대상으로 했다. 평안황해강원도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사민의 대상으로 강제 이주하면서, 오랜 군역과 흉년 등으로 도망자가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하삼도의 백성을 강제 이주하면서도 토지 지급이라는 보상을 당근책으로 제시했다. 13~15명으로 이루어진 1()가 이주할 때 30결 정도의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실제로는 농경 기간도 짧고 척박했기에 18결 정도에 불과했지만, 땅이 없던 이들에게는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이들이 정착할 때까지 2~3년 동안 원래 살고 있던 주민들의 토지를 일부 대여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정 기간 면세의 혜택과 함께 군역도 3년 후부터 부담하도록 했다.
 
일반 양민들의 이주만으로는 북방지역을 안정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 세조는 이주하는 양반층에 품계와 직위에 따라 10~30결의 토지를 지급했다. 땅의 개간이 잘 이루어지면 포상도 지급되었다. 하지만 참여율이 낮고 불만이 높아지자, 왕실도 참여시켜 반발을 무마시켰다.
 


성종 대까지 이어진 사민 정책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오랜 세월 하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과 북방지역의 사람들이 어울리면서 서로에게 동화되기 시작하였다. 강제로 이루어진 남북의 만남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이질감을 없애고 융화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같은 이들은 조선 백성이라는 공감대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 의병이 되어 왜군에 맞서 싸웠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바쳤다. 안중근, 홍범도 등 독립운동가와 신민회, 신간회 등 독립운동 단체 등이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은 한 민족이라는 토대 위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 시대 다른 지역에 비해 심한 차별을 받았다. 홍경래의 격문을 보면 조정에서는 평안도를 더러운 흙과 같이 여겨 노비들마저 이곳 사람을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면서, 중앙으로의 진출이 막힌 이들이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광복 이후 공산당에 의해 가옥과 토지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들은 억척같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북 사람들은 독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은 근현대사에서 만들어진 가슴 아픈 역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은 점차 희석되어 옅어지고 있다. 반면 남북의 문제는 지역감정을 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길게는 조선 시대부터 짧게는 분단 이후 남북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멸시한다. 갈등이 유발되는 것은 짧은 순간이지만, 봉합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지금의 남북 관계가 지역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사민 정책은 당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삶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하나라는 인식으로 융합하고 국가의 위기를 함께 이겨냈다. 다시 우리가 하나의 민족으로 하나의 국가로 함께 살아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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