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여성으로 태어나 자신의 꿈과 재능을 마음껏 펴지 못하고 잊힌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는 대표적 인물로 허난설헌을 꼽는다. 그러나 조선에서만 여성 차별이 심했던 것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동서고금에 큰 차이가 없었다. 중국의 경우도 1800년대 말까지 어린 소녀들의 발뼈가 부서질 정도로 꽁꽁 싸매 기형적인 발을 만드는 전족이 유행하였다. 서양도 아름다운 여성이나 미망인은 성폭행을 당하고 마녀란 누명 하에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역사의 과정이니까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바로 잡는 것도 역사의 책무다.
조선 역사에서 남자보다 담력이 크고 지혜로웠으며,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 소현세자의 아내이면서 인조의 큰 며느리 강빈(1611~1646)이다. 정묘호란이 일어나던 1627년 17살의 나이에 소현세자의 아내가 된 그녀는 병자호란이 없었더라면 무탈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벌어지고 청군이 한양으로 들이닥치자 강빈은 원자를 데리고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급히 향했다. 강화도로 향하는 나루에 도착했지만, 부둣가에는 한 척의 배도 없었다. 강화도의 수비를 책임지는 김경징이 자신의 가족을 옮긴 후 배를 강화도에 묶어둔 것이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이틀이나 배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모두가 어찌할지 모를 때에 강빈이 김경징에게 소리쳤다. “장차 이 죄를 어찌 갚으려 하느냐. 내 똑똑히 기억해두겠다.”라며 꾸짖자, 그제야 김경집은 소현세자 일행을 강화도로 모셨다.
김경징은 난공불락인 강화도를 청군이 절대 함락하지 못할 거라 자신만만했지만, 기대가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무리 지형이 유리해도 결국 적군을 막아내는 것은 인간이다. 김경징은 청군을 앞에 두고 무사안일하게 술만 마시며 경계를 소홀히 한 결과, 청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강화도를 함락하였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전의를 상실하고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그리고 왕자와 40여만 명의 백성을 인질로 내놓았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어린 원자를 데리고 추운 겨울날 심양으로 향했다. 천 리가 넘는 먼 길을 힘들게 걸어간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신하들과 수행원 등을 포함한 500여 명은 이곳에서 8년 동안 머물렀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분개감이 가득했으나, 청의 실재를 마주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성리학 틀에 갇혀있는 조선의 변화가 시급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특히 청나라가 세자 일행의 생활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자, 강빈은 500여 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강빈은 우선 청나라 귀족 부인을 찾아가 인맥을 쌓았다. 조선의 세자빈이라는 지위는 그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으나, 강빈이 몸에 두른 옷과 패물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강빈은 청의 국력이 강해졌지만, 아직은 문화 수준이 조선에 미치지 못함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들이 갖고 싶어 하던 조선의 물건을 가져다 청나라 귀족에게 팔면서 돈을 벌었다.
또한 둔전을 직접 경작했다. 유목 생활에 익숙한 청은 농경에 문외한이었다. 반면 조선은 수백 년간의 농경 생활로 수준이 높은 농업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인의 성실함은 견줄 데가 없었다. 둔전에서 막대한 소출이 나오자, 소현세자와 강빈은 이 돈으로 청에 잡혀 온 조선인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민으로 만들어주었다. 자유민 중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는 보내주고, 남아있는 자에게는 둔전을 내주었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청나라 황실과 친분이 두터우며, 조선의 백성을 자식처럼 아낀다는 소문은 인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정작 자신은 청에 잡혀다 도망쳐오는 백성들이 압록강을 넘지 못하도록 막으며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에게 수치감을 준 청과 가까이 지내는 아들 내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더욱 발전하여 청과 소현세자에 의해 자신이 왕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만들어냈다.
인조의 불안감과 불만은 며느리인 강빈에게 모두 쏟아졌다. 왕실 여인으로서 수치감도 없이 상것이나 하는 장사를 하여 소인배처럼 이문을 취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조가 얼마나 강빈을 싫어했는지, 강빈 부친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도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강빈는 괘의치 않았다. 원자를 포함한 2남 4녀의 아이를 키우면서, 왕실과 조선의 백성을 살피느라 마음의 상처를 받을 시간조차 없었다.
8년의 세월이 지나 조선으로 돌아오자 진짜 불행이 닥쳐왔다. 인조와 숭명반청을 주장하는 조정 대신들은 노골적으로 소현세자 부부를 경계했다. 백성들이 소현세자 부부를 환대할수록 그 경계심은 높아졌다. 그리고 두 달 뒤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었다. 실록에도 독살로 의심된다고 밝힐 정도로 갑작스러운 의문사였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강빈과 자식들에게도 여파를 미쳤다. 소현세자가 없자 강빈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강빈은 인조의 후궁 조씨를 저주했다는 모함을 받고, 1646년에는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누명을 썼다. 강빈을 포함하여 궁녀들이 독을 타지 않았다고 부인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절차가 있는 것처럼 강빈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강빈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었다.
강빈의 자식들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인조는 10살이던 원자 대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고, 강빈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이곳에서 두 아들이 죽고 셋째 이석견만이 살아남았다. 이석견의 자손이던 밀풍군이 이인좌의 난 때 왕으로 추대되면서 소현세자와 강빈의 자손은 더는 남지 않게 되었다.
강빈은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너무나도 완벽한 인물이었다. 남편 소현세자와 금실이 좋아 많은 자식을 낳았고, 현모양처로서 뒷바라지도 잘했다. 소현세자가 아프거나 바쁠 때는 대신 업무를 봐줄 정도로 소양과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주변을 탓하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여자 주제에’라는 프레임에 부끄러워하지도 굴하지도 않았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었지만 매정하지도 않았다. 심양에 끌려온 불쌍한 조선인을 위해 함께 울어주고, 아무 거리낌 없이 재물을 나누어주어 생계 수단을 마련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말로만 충절과 백성을 외치던 위정자들하고는 너무도 달랐다. 자신이 비난을 당하더라도 옳은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강빈의 억울한 죽음은 너무도 안타까움을 준다. 만약 강빈이 오늘날 태어났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