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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15. 2020

사도세자의 죽음 첫번째.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사도세자(1735~1762)의 죽음을 두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그리고 명확하게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세상 모든 일은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개인의 심정살아온 과정가치관을 비롯하여 가족과 사회의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진다일반 개인의 경우도 이러한데나라를 경영하는 왕은 더 많은 요인이 얽히고 얽혀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그래서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순하게 몇 가지의 요인에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과거에는 노론에 의해 사도세자가 죽었다고 설명했으나 최근에는 부자간의 어긋난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아지고 있다아무래도 역사에는 오늘날의 사회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자기 뜻대로 성장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역정으로 일관했던 영조부모의 편협된 사랑에 숨이 막혀버릴 정도로 중압감을 느낀 사도세자를 통해 국가와 역사를 조명하기보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올바른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최근 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영조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간주하여 소론에 의해 늘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왕이 되어서도 이복형인 경종을 죽였다는 세인들의 의심은 평생을 쫓아다녔다또한 노론은 영조를 왕으로 만들어주었다는 명분으로 모든 일에 압박을 가해왔다영조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역량을 키웠다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했고성리학에 따르는 삶을 먼저 보여주었다흉년이 들면 반찬의 수를 줄이고 술을 먹지 않았다경연을 자주 열어 학문을 숭상하며 신료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왕도정치의 본을 보였다.
  
적장자라는 정통성을 갖고 있지 못한 채능력까지 없다면 언제든 왕의 자리에서 내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 영조는 왕비에게서 아들을 낳고 싶었다그러나 영조는 정성왕후와 정순왕후 두 명의 왕비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했다. 4명의 후궁에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첫 번째 아들인 효장세자가 9살에 죽으면서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그러다 4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조선 왕들의 평균수명이 46.1세 불과했으니 영조의 기쁨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영조는 갓 태어난 아이를 친모 영빈 이씨에게서 떼어내 중전의 양자로 입적시켰다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빨며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하지만당시는 그러지 않았다후궁의 자식이 아닌 왕비의 자식이 되어 정통성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사도세자는 젖도 제대로 떼지 못한 채 어머니에게 떨어져서 궁녀와 환관들에 의해 키워졌다사도세자의 애정결핍은 친모의 사랑과 애정을 듬뿍 받지 못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그래도 사도세자의 영민했던 자질은 영조를 더욱 기쁘게 했다비록 후궁의 자식이지만 자신만큼 뛰어난 군주로 자랄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었다사도세자는 두 살에 글자를 이해하여 왕()을 보고 영조를 가리켰으며세자(世子)라는 글자를 보면 자신을 가리켰다글씨도 쓸 줄 알아서 천지왕춘(天地王春)을 종이에 써 내려가자 대신들이 앞다투어 가지려 할 정도였다또한 검소했던 영조의 눈에 쏙 들어올 만큼 사도세자의 행동은 남달랐다천자문에서 사치 치()를 보고 입던 옷과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벗어 던졌고영조가 비단과 무명에 대한 질문에 무명이 비단보다 더 낫다는 답을 했다효심 깊은 행동도 잘하여 9살이 되던 해영조가 부르자 입에 있던 음식을 뱉고 대답할 정도로 영조는 사도세자의 모든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었다그만큼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10대에 들어서자 영조와 사도세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사춘기에 접어든 사도세자에게 영조의 과도한 관심과 기대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혈기 왕성한 나이에 이른 아침부터 책을 펴고 공부하는 것도 사도세자에게는 맞지 않았다오히려 칼을 들고 무예를 익히는 것이 더욱 즐겁고 행복했다이런 사도세자를 영조는 처음부터 혼내지는 않았다오히려 책을 읽는 것이 좋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 솔직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그러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 것도 당부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사도세자가 10대에 들어서자 영조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청소년기의 사도세자는 영조의 눈을 피해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고이는 영조의 귀에 들어갔다무보다는 문을 숭상하던 조선에서그것도 아버지면서 임금인 영조 자신이 하라는 경전 공부를 소홀히 하는 사도세자에 대해 불만이 영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어떡하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길로 가게 만들어야 했다이런 생각은 늘 사도세자에게 칭찬만 하던 영조를 질책하기에 바쁜 모습으로 변하게 했다.

사도세자가 14살이 되던 해에 영조는 한나라 문제와 무제 중에 누가 더 훌륭한지 물었다사도세자가 문제가 더 훌륭하다고 답하자영조는 사도세자가 속마음을 숨긴다며 화를 냈다그 증거로 사도세자가 쓴 시의 한 대목인 호랑이가 깊은 산속에서 울부짖으니 큰바람이 분다.’를 읊으며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는 모습을 못마땅해했다.
 
많은 부모가 자녀가 어렸을 때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하던 모습을 떠올리며청소년기의 자녀도 자신이 제일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그리고 자신이 아직 통제 가능하다고 여긴다영조도 그러했다사도세자가 여전히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여기며 따라올 줄 알았다사도세자가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는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며혼을 내고 겁을 주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고 여겨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그 방법의 하나가 선위 의사를 밝히는 것이었다대게는 신료들을 길들이는 방법으로 왕위를 사도세자에게 넘기겠다는 쇼였지만막상 당사자인 사도세자에게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사도세자는 5, 6, 10, 11, 15살에 총 다섯 번에 걸쳐 조정 대신들을 대표하여 무릎을 꿇고 선위를 철회해달라고 빌어야 했다영조가 선위를 철회하기까지 사도세자는 신료들의 불만과 동정을 다 받아내야 했고끝없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되뇌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15살 때의 선위 파동은 사도세자를 길들이겠다는 목적도 포함되어 배로 힘들었다선위하는 이유로 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하여 훗날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니 자신이 살아있을 때 보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결국 마지막 선위 파동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뒤에는 무서운 아버지 영조가 있었고앞에는 조정 관료들이 있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신하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면 잘못될 가능성이 크니의심스러우면 대신에게 물어보라 알려주었다그리고도 어려우면 영조 자신에게 가져와 물으라고 알려주었다영조의 입장에서는 뒤에서 도와주겠다는 의미지만사도세자의 처지에서는 자신이 대리청정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은 필요하지 않고오로지 신하들의 이야기를 영조에게 전달하는 역할일 뿐이었다어떤 결정을 하든 아버지 영조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질책하는데 바빴고노론 대신들은 사도세자를 무시하고 영조에게 직접 말하고자 하였다결국은 허수아비 역할을 해야 하는 대리청정은 모두에게 상처만을 남겨주게 되었다영조는 사도세자를 더욱 믿지 못하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사도세자는 무엇을 해도 영조에게 혼나고신하들이 자신을 무시하면서 마음에 화가 쌓였다신하들은 영조와 사도세자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줄 서는데 바빴다.
 
다음 주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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