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대에 담배가 국고를 채우면서 삶이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로했다면, 숙종과 영조 시절에는 담배의 폐해를 담은 기록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오늘날 담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과 비슷한 내용이 많아 재미를 더한다.
종종 뉴스에서 담배가 담긴 상자를 훔치다 처벌받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담배 상자의 경우 가벼워 쉽게 들 수 있는 데다가 높은 가격으로 어디서든 쉽게 판매할 수 있어 자주 절도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담배를 피우는 척하며 뇌물을 주거나, 거래되어서는 안 될 물건을 주고받는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쓰인다. 그 결과 담배는 범죄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왔다.
사실 담배가 범죄에 악용된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담배는 누구나 찾는 기호식품으로 고가에 거래되면서 많은 사람이 훔치다가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뇌물로 바쳐지는 품목이기도 했다. 숙종 3년 무인이던 서치는 이조판서 민점의 사위에게 담배를 뇌물로 제공하고 감찰에 제수되었다. 물론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이처럼 서치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담배를 뇌물로 바치며 관직을 얻는 등 부정된 방법에 활용하였다.
담배는 게으름과 반항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백수가 집에서 빈둥거리며 담배로 소일거리를 하듯 조선 시대에도 담배는 게으름의 상징이었으며, 건방진 태도나 반항의 아이콘이었다. 숙종 5년 판윤이던 이정영은 사직서를 올리면서 제사를 담당하는 관원들이 목욕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며 눕거나 기대는 불성실한 태도를 꼬집었다. 숙종은 이들을 처벌하는 동시에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관원들도 징계하였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며 농땡이를 부리는 행위는 근절이 되지 않았는지, 숙종 7년에도 제사를 담당하는 관원들이 담배를 피지 못하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왕명보다 담배를 피지 못하는 현실이 더 무서웠나 보다. 숙종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 중 하나인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리기 위해 사직단에서 하룻밤은 지내면서 모든 관료에게 술과 담배를 절대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과거 제사를 앞두고 담배를 피우다가 처벌받은 사례가 있었음에도 흡연 욕구를 참지 못한 관료 두어 명이 흡연하다 처벌받았다.
영조도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국가의 중요 의식에서 담배 피우는 행위는 하늘을 노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영조 3년 가뭄으로 벼가 타들어 가자, 종묘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기우제를 벌였다. 이때 종묘에 드나드는 모든 관헌에게 목욕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술과 담배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중요한 제사에서 담배를 피지 못 하게 하는 것은 영조 재위 시절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또한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관료들을 표현할 때도 담배가 사용되었다. 영조 51년 관리들이 조정에 나와 근무를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이다가 퇴근한다며 관료의 기강을 문제 삼았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무엇보다 숙종과 영조가 담배를 엄하게 근절했던 이유는 화재에 있었다. 목재로 전각을 세우는 우리나라에서 화재는 늘 경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담배가 들어오고 나서 화재가 빈번해지면서 많은 국고를 낭비했다. 숙종은 화재를 염려하여 능 안에서 담배를 피지 못하게 늘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 18년에 재실 옆에서 불이 나는 사고가 벌어졌다. 숙종은 크게 노하며 병조의 낭관을 파직하고, 불을 낸 사람을 가두어 죄를 물었다.
또한 담배는 국고 수입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담배 농사는 개인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이 상업보다 농업을 중시했던 이유는 조세를 거두기 편리하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벼농사보다 담배 농사가 더 큰 수익을 내자, 많은 백성이 논과 밭을 갈아엎고 담배를 심었다. 그 결과 조세가 줄어들어 국가를 경영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결국 영조 8년에는 이주익의 상소를 받아들여 삼남의 토지에 담배 심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실효성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에도 담배는 문제가 되었다. 과거 시험을 보는 현장에서 응시자를 비롯한 과장에 참석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소란을 떨거나 다른 응시생의 시험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90년대 수능 고사장에서 쉬는 시간이 되면 응시생들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특히 영조 49년에는 과거 시험을 주관하며 부정행위를 막는 관리가 오히려 담배를 팔며 이득을 취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떠오르는 담배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사건들이 숙종과 영조 시절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모습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시나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훗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부정적인 것만 찾는다면 부정적인 역사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담배의 안 좋았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는 역시”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굳이 역사를 알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담배의 부정적인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지역에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담배의 부정적인 모습을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역으로 담배의 안 좋은 모습마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던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세상 어디에도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한 나라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후손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갈지 생각할 기회를 준 선조에게 감사함이 느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