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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02. 2021

세조에 반기를 들다.


이시애(?~1467)는 길주(현재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태어났다. 조선 초기 북방 개척을 위해 토착민을 중용하는 정책에 혜택을 입어 1450년(문종1년)에 호군이 되었다. 세조 때 경흥진 병마절제사를 거처 첨지중추부사‧판회령 부사가 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징옥의 난이 일어난 이후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토호들에게 관직을 주지 않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지방관으로 내려간 수령은 유향소를 통해 지방을 통제하면서 그동안 내려오던 권리를 제한했다.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부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이시애는 세조의 정책에 반감을 품고, 1467년(세조13년) 반란을 준비했다. 장례식에 모인 집안 식구를 시작으로 함경도 지역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시애는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올라와 함경도 군민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말로 반정군을 이끌고 절도사 강효문과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였다. 이에 함경도의 군인과 백성들이 그동안의 울분을 담아 중앙에서 내려온 수령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시애는 중앙정부에 혼란을 주고자 “병마절도사 강효문이 한명회‧신숙주와 결탁하여 함경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려 한다. 그러니 함경도 사람을 고을 수령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조정에 거짓 정보를 넣었다. 세조는 곧바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을 잡아들였지만, 이시애의 반란군이 단청‧북청을 차지하고 남쪽으로 향해 내려오자 거짓임을 알고 풀어주었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어유소‧강순‧남이 장군에게 3만의 군대를 주어 토벌토록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까지 끌어들인 이시애는 자신이야말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고  외치며 함흥에 있던 관찰사 신면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을 잡으며 기세를 높여갔다. 그러나 세조가 직접 친정(親征)을 계획하는 등 강경책으로 나가자, 이시애 군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또한 북청에서 토벌군과의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자, 이시애의 군대에 내분이 일어났다. 


연이은 패배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자신들이 반란군이었다는 사실에 병사들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이를 눈치챈 조정은 허유례를 보내 이시애의 부하 이운로를 회유했다. 결국 정부의 꼬임에 넘어간 이운로는 이시애 형제를 붙잡아 토벌군에게 넘겼다. 이시애를 참수한 세조는 함경도를 남‧북으로 나누고, 길주를 길성현으로 강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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