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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pr 20. 2021

첫 번째 성공은 매우 중요하다.




19~20세기 식민지에서 독립한 많은 나라가 독재와 낙후된 경제 모습을 보였다. 신생국가들을 예전에 지배했던 국가들은 과거 식민지였던 이들을 비하하며, 자신들이 식민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백 년 이상 제국주의자들에게 세뇌당한 데다가, 비참한 현실에 마주한 신생국가들은 제국의 주장에 수긍했다. 그리고 제3국도 제국의 주장에 동조하며, 과거 식민지 국가를 무시했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독립된 나라들의 능력 부족이나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의 모든 원인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제국의 교묘한 술수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제가 친일파를 육성하면서 민족이 분열되었다. 일제는 끊임없이 한국의 민족성이 게으르고 거짓말 잘하며, 단합도 못하는 데다가 냄비근성이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 독립한 지 76년이나 지난 지금도 남녀노소 일제가 심어놓은 부정적 인식을 되뇌는 사람이 많다.

 




독립 후에도 우리는 일본에 경제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산미 증식계획으로 쌀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지고, 산업과 유통도 단순해졌다. 1930~40년대는 전쟁 물자를 양산하기 위해 남면 북양정책과 중공업 위주로 경제가 편중되면서 기형적인 경제구조를 보였다. 더욱이 한국인을 하급 기술직으로만 채용하면서 광복 이후 공장이 있어도 가동할 엔지니어가 없었다. 경제개발을 위해 기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도 정치적 역학관계와 호환문제로 일본 제품을 수입하면서 경제가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공사현장이나 공사에 사용되는 도구들이 일본 용어로 불리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에 비해 일본에 의존도가 많이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은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일본에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6·25전쟁의 물품공급기지라는 특수성으로 일본은 경제회복을 넘어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 여파는 한국에도 미쳤다. 미 군정에 의해 비호 된 친일파는 정치와 경제의 특권을 계속 이어나갔다. 여기에 미국이 신생국가의 특정 인물을 전폭 지원하여 독재 체제를 마련해 준 뒤, 내정 간섭 하는 정책을 대한민국에서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현실과 민족분열은 미국의 계획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이승만이었다. 누구나 아는 독립운동가의 이미지에 6·25전쟁에서 끝까지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의 인기는 국민에게 매우 높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전쟁을 막고 경제원조를 요구함으로써 평화와 먹거리를 마련한 공적은 다른 부정·비리를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의무교육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늘어날수록 독재에 대한 저항이 커져갔다.




1960년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치료를 위해 미국을 간 것을 기회 삼아 정부통령선거를 두 달이나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하였다. 조병옥이 죽으면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해졌지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고령으로 죽으면 부통령에게 승계가 이루어지는 만큼, 이기붕의 당선이 자유당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자유당의 4할 사전투표, 3·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다양한 방법의 부정선거는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의 부정선거 규탄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던 중, 4월 11일 마산 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죽은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를 본 학생과 시민들은 더욱 정부를 규탄했다. 특히 고려대생 3,000명이 의사당에서 시위하고 돌아가는 길에 폭행을 당하자, 서울 각 대학생이 4월 19일 중앙청으로 행진했다.

정부는 경무대로 향하는 시민에게 무차별 발포를 시작으로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죽고 45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경찰과 반공청년단만으로는 시위대를 진압하지 못하자, 정부는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군대에게 시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다행히 계엄군 사령관 송요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부는 군을 통제할 수 없자,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사퇴와 이승만 자유당총재직 사퇴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직 사퇴와 재선거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4월 25일 대학교수 259명이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자, 더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하야를 요구했다.
 
송요찬의 주선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학생과 시민대표 5명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더는 협상 카드가 없음을 체감하고 하야와 내각책임제 개헌을 약속했다. 하지만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라는 말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대의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위선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을 성공시킨 4·19로 대한민국은 자신감을 얻었다. 잘못을 바로잡은 성공의 경험은 번번이 자유 민주주의를 짓밟는 역사에 항거할 힘을 주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 중에서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단시간에 이룬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미래에도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성공의 경험을 준 4·19혁명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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