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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04. 2021

조선 수군을 재건하라.


                                    고하도 이충무공 기념비, 출처 : 문화재청


명나라와의 휴전 협정이 지지부진해지자, 일본은 유리한 협상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재침입을 준비했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이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은 전쟁물자의 보급 확보가 어려워 대규모 전쟁이 불가능했다. 일본은 요시라를 통해 가토 키요마사가 재출병한다는 거짓 정보를 조선에 흘렸고, 선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에게 출정을 명령했다.
 
이순신이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출정을 거부하자 모진 고문을 가한 뒤 백의종군시켰다. 반면 이순신 대신 조선 수군을 이끈 원균은 무리한 작전 수행으로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크게 패배하며 죽었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는 전장에서 도망쳐 나온 배설뿐이었다. 조선 수군이 무너진 소식에 깜짝 놀란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복직시켰고, 일본의 침입을 대비케 하였다.
 




이순신은 13척의 판옥선과 천여 명의 병사로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는 명량대첩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수군의 전선과 병력은 조선 수군을 상회하고도 남았다. 단지 일본의 기세를 꺾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울돌목에 더 머무르면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빨리 전선을 이동하여 조선 수군의 실체를 감춰야 했다. 일본 수군이 겁을 먹고 함대를 운영하지 못하게 막는 동시에 조선 수군의 휴식과 정비 시간 확보가 필요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당사도-어외도-칠산도-법성포-홍농-고참도-고군산도를 이동하며 일본의 눈을 피했다. 약이 오른 일본 수군은 전라도 연안을 돌며 백성을 살육하고 약탈하며 명량해전의 패배를 분풀이했다. 하지만 감히 북으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목포수군제, 출처 : 목포시 홈페이지



이순신은 명량대첩이 끝난 지 42일 만에 목포 고하도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전열을 정비했다. 목포와 신안군은 섬이 1,004개나 있어 일본 수군의 눈을 피하기 좋았고, 일본도 조선 수군의 매복이 두려워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특히 고하도는 12리에 달할 정도로 큰 섬으로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기에 적합했다. 또한 13~14세기 몽골과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장기간 농성할 목적으로 축조한 산성이 남아있어 일부 성곽 시설만 보수하면 되었다.

맞은편에 있는 유달산은 높지는 않지만, 정상에 서면 바다와 육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일본군의 이동을 감시하기 매우 적합했다. 그리고 멀리서도 유달산의 노적봉은 잘 보였다.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목포에 접근하자, 이순신은 멋진 계략을 펼쳤다. 노적봉을 볏짚으로 덮고,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을 짓는 쌀뜨물처럼 아래로 흘려보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군세가 형편없을 것으로 생각하다가 산처럼 쌓인 군량을 보고 깜짝 놀라 도망쳤다.
 

                                                            유달산, 출처 : 목포시 홈페이지


이순신은 고하도에 진을 설치하고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해 병력 보충과 전선 건조에 힘썼다. 우선 순찰사를 만나 연해안 19개 고을을 수군에 전속시켜 병력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죄를 묻지 않겠다는 면사첩을 통해 일본군에게 부역하던 조선인을 수군에 편입하였다. 이외에도 인근 명망 있는 집안에서 병력을 이끌고 수군에 합류하면서 병력이 천여 명 증가하였다.
 
고하도 인근 지역은 소나무가 풍부하고, 인접한 영암‧나주 지역은 예전부터 전선을 만들어 오던 지역이어서 빠른 속도로 전선 건조가 이루어졌다. 고하도에서 머무는 동안 40여 척의 배가 만들어지면서, 칠천량해전에서 손실된 함대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고하도에서 불과 106일을 머물면서 천여 명의 병력을 보충하고,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조선 조정의 지원이 형편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자력으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로통행첩제도를 시행하였다.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은 조선 수군에게서 통행첩을 받아야 이동할 수 있었는데, 큰 배는 쌀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이었다. 이렇게 열흘 동안 거둬들인 군량미가 만여 석에 달했다. 과하다고 생각할 수있는 통행세지만, 피란민으로서는 목숨과 온 재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달산 이순신 동상, 출처 : 목포시 홈페이지


정유재란에서 명량대첩의 승리로 일본군의 기세를 꺾었다면, 고하도에서의 빠른 수군 정비는 옛 전력을 되찾아 일본군의 또 다른 도발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과의 마지막 결전을 치른 노량대첩에서 조선 수군은 60여 척의 판옥선과 7천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싸울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목포는 조선 수군이 재건하여 일본을 쫓아 낼 힘을 키운 장소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목포를 방문하면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장소가 많다. 한 예로 유달산 중턱에 있는 이순신 동상은 일본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약간 기울어져 일본에게 경고하고 있다. 목포시도 4월이 되면 ‘목포 이순신 수군 문화 축제’를 개최하여 많은 이들이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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