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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13. 2021

은하수처럼 아름다운 미리내성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 맞닿아있는 교통의 요지에 사는 안성 사람들은 타지역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접하며 살아왔다.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물자 그리고 정보가 유입되면서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가 이곳 안성에서 만들어졌다. 몽골의 침략을 막은 죽주산성, 임진왜란 당시 황소를 이용하여 승리한 죽산전투, 이인좌의 난 때 관군과의 전투, 일제강점기 3·1운동 등이 안성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조선 정부의 탄압에도 믿음을 지켜나간 천주교의 성지를 대표하는 미리내 성지도 있다.


19세기 안성은 충청남도의 내포 지역의 많은 사람이 천주교 탄압을 피해 몰려든 장소였다. 교통의 요지로 접근이 용이했던 만큼, 이곳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안성의 깊은 산골짜기는 천주교인들이 믿음을 이어나가기 위한 피난처로 비밀스럽게 알려지면서 경기도, 충청도의 천주교인들이 가산을 정리하고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소 중의 하나가 미리내였다.
 
1801년 노론 세력이 정조의 측근을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탄압했던 신유박해를 피해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리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천주교 탄압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미리내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미리내 고개 너머 멀지 않은 한덕골도 천주교인들의 보금자리였는데,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1821~1846)이 태어났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히면서 미리내 성지와 주변은 오늘날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다.


미리내 성지가 있는 지역을 살펴보면 왼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오른쪽으로는 중부고속도로, 북쪽으로는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이처럼 교통의 중심지 가운데에 있는 미리네 성지는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미리내 성지로 향하는 1차선의 좁은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를 벗어나고서도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산골짜기 사이로 미리내 성당이 보인다. 지금이야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만들어져 접근이 쉽지만, 200년 전 과거에는 외부로부터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이 도착하기 전부터 와닿는다. 은하수라는 뜻의 ‘미리내’라는 이름부터가 이곳이 얼마나 외부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깊은 산골짜기에 하늘의 은하수가 잘 보일 만큼 외지라는 뜻의 미리내 지명은 이곳의 지형과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해준다.


미리내 성지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정면을 바라보면 길이 둘 갈래로 나누어진다. 왼쪽 길로 가면 김대건 신부의 묘지와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가 모셔져 있는 성 요셉 성당과 12위 무명 순교자 묘지를 방문할 수 있다. 미리내 성지에 도착한 나는 어느 장소를 먼저 가볼지 잠시 고민하다가 김대건 신부 묘지를 먼저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김대건 신부 묘지를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103위 시성 기념 성당 앞에 있는 잔디광장을 지나서 가는 방법이 있고, 성당 뒤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은 없지만, 십자가의 길을 따라 김대건 신부 묘지로 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래야 예수가 로마 병사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는 과정을 표현한 청동 조각을 시간의 순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을 잘 걷지 않기 때문에 조용히 산책하며 사색에 잠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 묘를 만나고 잔디광장을 만났을 때 산골짜기 안으로 이토록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사실에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답답하게 막혀있던 가슴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는다. 잔디광장을 마주하기 전까지 김대건 신부와 그와 관련된 분들의 숭고함과 안타까움에 무거워졌던 마음이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김대건 신부가 묻혀있는 경당에는 천주교 조선 교구 3대 주교 페레올 주교 묘지와 김대건의 어머니 고울슬라 묘지가 있다. 이들만이 아니라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서울 새남터에서 이곳까지 옮겨온 이민식 묘지와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이자 미리내 성당의 초대 주임인 강도영 마르코 신부의 묘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열아홉 번째 사제로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을 지낸 최문식 신부의 묘가 모셔져 있다.
 
사실 이곳에 계신 분들을 알지 못한다면 영화에서나 본 듯한 작고 아름다운 교회로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 누워계신 분들의 생애를 보면 미리내가 왜 천주교의 성지라 불리는지를 알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를 믿으면 죽을 수 있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증조부 때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방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넘어가 신학 공부를 마친 김대건 신부는 부제가 되어 1845년 귀국했다. 서울에서 천주교회가 자리를 잡도록 노력하던 중 페레올 주교의 집전하에 상해 완당신학교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페레올, 다블뤼 신부와 다시 국내로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의 복음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신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황해도에서 신부가 몰래 들어올 경로를 마련하다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도 정부 요청을 받아들여 세계 지리의 개략을 편술하고,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개화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버리지 않고, 꼿꼿하게 새남터 형장에서 죽었다. 로마교황은 1984년 김대건 신부를 믿음과 업적을 인정하여 성인으로 선포하였고, 2019년에는 유네스코에서 2021년 세계기념 인물로 확정하였다.



김대건이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데에는 페레올(1808~1853) 주교가 있었다. 프랑스인이었던 페레올은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부가 될 수 있도록 신학을 가르치고 유학을 주선했다. 제2대 주교 앵베르가 기해 사옥으로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실천했다. 페레올의 노력 덕분에 한국 천주교는 뿌리를 내리고 많은 이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종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은 건강을 돌보지 않고 복음에 전념하다가 병이 들어 한국에서 눈을 감았다.


경당 뒤편에 있는 고울술나의 묘는 단순히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잠시 그 앞에 서서 묘를 내려다보며 어머니 고울슬라에 감정이입을 하면, 부모로서 가슴이 미워 오면서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고, 천주교를 믿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당시에 10대의 어린 김대건을 파란 눈의 신부 말만 믿은 채, 듣지도 못한 먼 지역으로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울슬라는 어린 김대건을 멀리 떠나보내고 나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늘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내기를 하느님에게 기도드렸을 것이다.
 


그렇게 기다린 시간이 10년, 어느덧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가 돌아왔다. 아들과 마주 앉아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 것도 잠시 김대건 신부가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40여 일 후 이민식이 가져온 아들의 시신을 마주한다. 그토록 간절히 하느님에게 아들의 무사를 빌고 빌었는데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아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하느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울슬라는 김대건 신부가 쓴 옥중의 편지를 받아들고 모든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여, 평생 하느님을 믿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그녀의 숭고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기념하기 위해 경당 입구에 한복을 입은 여인이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축 늘어진 채 죽은 남성을 안고 바라보는 ‘순교자의 모후’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저의 어머니 고울술나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보았을 뿐인데 또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고울술나 묘지 옆으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서울 새남터에서 안성 미리내까지 옮겨온 이민식 묘지가 있다. 버려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라도 제대로 묻히기를 바랐던 사람 중에 17살의 이민식이 있었다. 이민식은 몇몇 교우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몰래 둘러업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길로 산길로 이동했다. 150리 길 약 60여km를 밤에만 걸어 닷새 만에 미리내 성지로 도착했다. 김대건 신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이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신념과 믿음 두 단어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분들이 묻혀계신 이곳은 천주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영구히 보존하면서, 그분들의 뜻을 기억하고 이어가기 위해 1972년부터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로마교황청이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으로 희생된 순교자 103인을 성인으로 승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89년 미리내 성지에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이 건립했다. 이곳에는 하느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천주교 박해를 당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들도 있다. 그리고 성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는 우리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나무로 조각한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 신부가 있다.


다시 미리내 성지 입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성 요셉 성당과 말구우물이 나온다. 성 요셉 성당은 1906년에 건립되었는데, 고즈넉한 모습에 눈길이 간다. 1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의 염원과 마음이 마룻바닥과 벽돌 하나하나마다 담겨있다고 생각하니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성 요셉 성당 옆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뛰어온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는 물을 긷던 아낙네들이 모였을 말구우물은 정겹게 느껴진다. 이 외에도 성 요셉 성당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16위 무명 순교자 묘역과 수원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있다.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있어 이곳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적지만, 묘역 아래로 나 있는 산책길에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분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미리내 성지 곳곳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나누어져 보관되고 있다. 103위 시성 기념 성전 제대에는 김대건 신부의 종아리뼈가 안치되어 있고, 김대건 신부의 묘지가 있는 경당에는 발뼈가 보존되어 있다. 성 요셉 성당에는 김대건 신부의 턱뼈가 보관되어 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기리는 미리내 성당이지만, 둘러볼수록 종교를 넘어 200년이 넘는 기간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수많은 사람이 더 대단해 보인다. 어찌 보면 김대건 신부도 그들 중의 한 분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올바른 것을 지키려는 믿음과 신념이 얼마나 중요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미리내 성지는 천주교만의 성역이 아니라는 마음이 커진다. 종교를 떠나 시간을 내어 미리내성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작은 계곡 옆에 나 있는 벤치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번잡했던 현실에서 잠시 동떨어지는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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