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Jun 30. 2021

덕수궁 둘러보기



세조의 손자였던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왔으나,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이 모두 불타 거처할 곳이 없었다.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월산대군의 자손들이 살던 집을 정릉동 행궁으로 삼아 임시 거처로 사용하였다.
 
선조는 심의겸의 집을 동궁으로 삼고, 심연원의 집을 종묘로 사용하며 16년을 이곳에서 보내다가 죽었다. 경운궁 서청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궁호를 붙였다. 그러나 두 달 만에 다시 경운궁으로 되돌아온 광해군은 4년 동안 머물다가 1615년(광해 7년)에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광해군은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경운궁에 유폐하였다. 이 과정에서 궁궐로 사용하던 경운궁은 관리가 되지 않아 아문이 허물어지는 등 옛 모습을 잃어갔다.


1623년(인조 1년) 광해군을 내쫓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경운궁에 유폐되어있는 인목대비를 찾아와 반정을 인정받고 즉조당에서 즉위하였다. 인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은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궁궐의 기능을 상실했던 경운궁은 1896년(고종 33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태후와 태자비를 머물게 하면서 다시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듬해 경운궁에 전각을 세워 궁궐의 형태를 갖춘 뒤, 이곳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고종 41년) 의문의 큰 화제로 경운궁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타자, 즉조당 등을 비롯한 많은 전각을 중건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것을 문제 삼은 일본에 의해 고종이 경운궁에서 강제 퇴위당하고, 돈덕전에서 순종이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본은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인 덕수(德壽)로 궁호를 바꾸면서 덕수궁이 되었다. 그러나 덕수의 의미에는 고종에게 더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협박이 깔려있었다.
 
고종은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덕수궁에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원이 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 운영되다가, 광복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열렸다. 1947년에는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덕수궁에 자리하며 근현대사의 중심이 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석조전이 불타는 등 피해를 보았다. 덕수궁은 여러 전각이 필요에 따라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다른 궁궐과는 전각 배치 양식이 다르게 나타났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덕수궁의 일부가 사라지거나 변형되었으나, 기존 궁궐에서 볼 수 없는 서양 건축물 석조전 등 이색적인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보다 너무 작았던 처인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