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에 처인성이 있다. 처인성은 고려 중기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승려 김윤후가 부곡민을 격려하여 승리를 이끈 장소다. 몽골장수 살리타를 활로 고꾸라트리고 몽골군을 격퇴한 처인성 전투는 역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리고 1970년대 복원된 처인성은 우리가 언제든 방문할 수 있도록 늘 개방되어 있다.
하지만 처인성을 방문하면 당황스러울 수 있다. 처인성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성의 모습이 아니라 조그마한 언덕이 있는 공원 같은 모습이다. 처인성은 돌로 만든 석성이 아니라 흙으로 성벽을 만든 토성인데다, 둘레가 350m에 불과해서 처인성을 한 바퀴 도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다. 또한 성벽의 높이도 3m에 불과한데다 경사도 완만하여 성인 남성이 마음만 먹으면 성곽 위로 쉽게 뛰어 올라갈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이런 작은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이겼다는 것이 당최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상황과 주변 지역을 보면 이해가 된다. 처인성 전투가 벌어진 배경에는 몽골의 침략이 있다.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동아시아의 최강자였던 금나라(1115~1234)를 손쉽게 꺾고 멸망으로 몰고 있었다. 몽골제국에게 속국이란 개념은 없었다. 주변의 모든 나라는 정복의 대상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들의 발 앞에 무릎 꿇려야 하는 국가였다.
고려도 예외 대상이 아니었다. 몽골 사신 저고여가 피살당한 사건을 명분 삼아 1231년 고려를 쳐들어왔다. 총 3개 부대로 이루어진 몽골군을 이끈 살리타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충주까지 내려가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약탈을 자행했다. 그럼에도 고려 정부가 항복하지 않고 개경에서 결사 항전하자 경기도를 폐허로 만들었다. <동국이상국집>은 몽골군이 경기 지역까지 침범하여 사방을 유린하는데 마치 범이 고기를 고르듯 하였으며, 죽은 자가 길에 낭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고려 정부는 몽골군의 거센 공격에 개경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화친을 맺어 위급한 상황을 모면했다. 하지만 항복은 아니었다. 몽골에 저항하기 위해 잠시 멈춤이었을 뿐이었다.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결사 항전을 외쳤다. 하지만,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지키는 행태에 불과한 것이었다.
살리타는 1232년 8월 다시 몽골 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범했다. 대구까지 내려가 고려의 국토를 짓밟던 살리타의 만행은 1차 침입 때보다 더 심했다. 거란과의 전쟁 당시 부처님의 힘으로 승리를 이끌고자 만들었던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버리는 등 막심한 피해를 보았다. 특히 몽골 군은 지척에 있는 강화도를 함락하지 못해 약이 올라있었다. 또한 광주성에서 몽골 군을 격퇴하는 등 고려의 저항이 심해지자 조급해지기도 했다.
살리타는 교통의 요지였던 처인성을 함락하여 아직 정복하지 않은 지역과의 연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인성이 있는 지역은 부곡지역으로 고려 시대 천대받던 지역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면서도, 불이익을 당하던 곳이었다. 그런 이곳에 돌로 튼튼한 성을 쌓았을 리가 만무했다. 그저 형식적인 방어시설로 토성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즉, 처인 부곡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살리타가 500여 기병을 이끌고 처인성을 향해 온다는 소식에 관군과 양반들은 모두 도망쳤다. 처인 부곡민들도 살기 위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처인성 부근은 온통 낮은 산들이어서 숨을 만한 골짜기가 없었다. 처인 부곡을 떠나 멀리 가고 싶어도, 기동력이 뛰어난 몽골 군에게 따라잡힐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나마 방어시설을 갖춘 처인성으로 모이는 것뿐이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병장기를 잡은 부곡민들에게 희망스러운 일은 승려 김윤후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에서 승려가 가지는 힘은 매우 큰 힘이었다. 부처님의 도와주실 거라 외치는 승려의 말 한마디는 부곡민들이 안정을 되찾게 해주었다. 더욱이 김윤후는 뛰어난 군사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두 번째 희망은 살리타가 처인성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접근했다는 점이다. 살리타는 5~6기의 기병만을 데리고 처인성을 둘러보고자 다가왔다. 매복하고 있던 김윤후와 부곡민은 살리타에게 활을 날렸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살리타는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총장수 살리타를 잃은 몽골 군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급히 퇴각했다. 고려에 들어온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궁지에 몰려 필사적이었던 저항과 뛰어난 김윤후의 지략, 그리고 처인성을 우습게 본 살리타의 자만이 엮여 이루어낸 승리였다. 고려 정부는 몽골장수 살리타를 죽인 김윤후에게 상장군 직을 내렸지만, 김윤후는 거부했다. 김윤후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기도 했지만, 섬에 숨어 자신들의 안위만 챙기는 고려 정부의 실망감이 상장군 직을 포기하게 만든 요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김윤후는 상장군 대신 섭랑장을 받았다. 이는 아마도 백성들을 지킬 최소한의 힘을 갖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김윤후는 이후 몽골 군의 침략에 맞서 충주성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백성들을 지키는데 늘 앞장섰고, 매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반면 처인 부곡민들의 삶이 크게 나아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몽골 군이 물러난 후 논과 밭에서 다시 굵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가을이 되면 강화도에서 고려 관리들이 나와 엄청난 조세를 거둬갔을 것이다. 또한 몽골 군도 연이어 고려를 침입하면서 늘 불안하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처인성에서 멀지 않은 남사읍에 중동복지회관이 있다. 회관 앞에는 세 그루의 보호수가 있는데, 그중 두 그루는 수령이 800년 이상 되는 느티나무다. 이곳에 잠시 머무르며 나무 아래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도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나무는 800년 전 몽골 기마대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매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고, 이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겠구나. 백성들이 웃는 모습으로 집과 논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보고 한탄하는 모습도 묵묵히 담아두었으리라 생각하니, 더 이상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평범한 나무로 보이지 않았다.
보호수는 오랜 세월 처인성 부근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 왔을 것이다. 최근 처인성 주변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예전에 비해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처인성 주변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더라도 보호수만큼은 오래도록 보호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만약 처인성에 방문하게 되면 이곳에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역사란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그렇기에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모습에 감정이입하고 공감해야 한다. 눈을 감고 몽골 군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을 떠올리며, 부곡민의 한 사람이 되어본다면 그 당시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방어시설도 변변치 않은 이곳에서 승리했을 때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겠지.
그리고 눈을 뜨면 오늘날에서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 처인성 맞은편에 있는 처인고등학교에서는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까? 분명 다른 장소의 학교와는 다른 메시지를 전해주려 노력하겠지. 처인성 앞에서 한창 공사 중인 기념관이 완공되면 어떤 내용과 체험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을지 상상해본다. 아마도 현재 처인성 발굴 조사에서 나오는 새로운 것들이 추가될 것이라 상상하다 보면 시간이 어느새 후다닥 지나간다. 백지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