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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26. 2021

위정자의 표본 이원익



경기도 광명시를 대표하는 인물 이원익(1547~1634)은 필자가 좋아하는 위인 중 한 명이다. 선조 때에는 유난히도 뛰어난 인물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분이 이원익이다. 대부분이 도덕과 명분 등을 내세우며 실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할 때, 이원익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제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현실화했다. 또한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목숨 걸고 직언하여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작은 이익마저도 탐내지 않고 일평생 청백리로 살았던 그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원익은 태종의 아들 익녕군의 4대손으로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왕족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난 이원익은 요즘 말로 금수저였다. 학문 성취에도 남달라 17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2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나갔으니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살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어렵게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심을 알지 못하는 위정자는 높은 관직에 올라서도 민생해결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들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러나 이원익은 여느 관리들과는 달랐다.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 시절부터 백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이원익이 젊었던 시절은 임꺽정이라는 도적이 잡힌 지 10여 년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삶이 어려워진 백성들은 자연스레 군역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아, 군적에는 병사가 있으나 실제로는 아무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원익은 그런 상황에서 황해도 도사로 임명되어 백성들을 다독이고 흐트러진 군적을 바로 잡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황해도 안주 목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백성들이 심을 곡식도 없음을 보고, 양곡 1만 석을 관찰사에게 받아 보급했다. 이원익의 노력과 백성의 절실함은 원곡을 갚고도 엄청난 양이 남을 정도의 풍년을 만들어냈다. 여성들에게는 누에 키우는 것을 알려주어 가계의 수익을 올리고, 군역도 개혁하여 3달 근무를 2달로 줄여주었다. 이는 평소 백성들에 관심 두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뛰어난 행정가였던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 훌륭한 군지휘관의 모습도 보였다. 이조판서로 평안도도순찰사가 되어 평안도에 먼저 도착한 이원익은 피난 온 선조를 평양에 모셨다. 평양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영변으로 모시며 모든 제반 사항을 처리하였다. 명나라 원군이 왔을 때는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였다.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이원익은 1595년에 우의정 겸 4도 체찰사로 왜군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하였다.
 
특히 이 시기 이원익이 없었다면 조선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늘 약자의 편에 섰고, 실무를 담당하며 진짜 인재가 누구인지 잘 알던 이원익은 이순신을 구해냈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시기·질투와 당파 싸움에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도 모르던 관료들이 이순신을 죽이려 할 때, 이원익만큼은 이순신을 옹호했다. 선조에게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라며 간언했다. 이원익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선조는 이순신은 백의종군시키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이순신이 죽지 않았기에 명량해전에서 왜의 재침을 막아낼 수 있었다.
 



광해군도 이원익의 인품과 능력을 임진왜란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왕 대에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이원익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광해군은 이원익을 영의정에 모시고 전란 극복에 매진했다. 이원익이 건의한 대동법을 경기도에 실시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대동법의 실행은 상품화폐 경제를 발달시키면서 조선을 200년이나 더 지탱할 수 있도록 해준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그러나 광해군과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광해군이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자 친형 임해군을 죽이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자, 이원익은 어떡하든 막아보려고 했다. 사직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내걸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23번의 사직서를 제출하며 신경전을 벌인 끝에 낙향하고 말았다. 이후 광해군의 설득에 영의정으로 복귀하지만,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출하는 것에 강력히 항의하다 귀양 가면서 광해군과의 인연은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인조가 광해군을 죽이려 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광해군의 목숨을 지켜내며 군신 관계의 의리를 잊지 않았다.
 


1623년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는 이원익을 찾아와 영의정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반정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가장 신뢰하는 이원익의 도움이 절실했다. 76살이라는 노구였지만, 이원익은 다시 한번 백성을 위해 인조의 부름에 응했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로 피신시키며, 선조에 이어 두 명의 왕을 지켜내야 했다. 인조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곁에서 호위했던 이원익을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신하들이 대지주인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동법을 반대했지만, 인조는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이라는 굵직한 사건들로 이원익은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끊임없이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지켜내느라 평생을 다 바쳤다. 그러나 그의 삶에 커다란 사건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1627년 여진족이 조선을 쳐들어온 정묘호란이 벌어진 것이다. 여든이라는 나이였지만, 국난을 해결할 이는 이원익밖에는 없었다. 이원익은 도체찰사가 되어 인조와 세자를 수행하며 후금과 손해 보지 않는 협정을 맺고, 전쟁을 매듭지었다.


인조는 정묘호란 이후 훈련도감 제조에 임명하며 중용하려 했지만, 이원익의 나이가 너무도 많았다. 이원익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금촌에 내려와 인생을 정리하다가 1634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5년이라는 관직 생활 동안 영의정 여섯 번, 도체찰사 네 번을 역임한 이원익이었지만, 재산이라곤 낡은 오막살이가 전부였다. 먹을 끼니가 없어 돗자리를 짜서 생활할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이원익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이 한 사람으로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왜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라고 평가했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원익에 대해 아는 사람이 실로 많지 않다. 광명시도 오리서원을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이원익의 행적과 인품을 소개하고 있다. 덕분에 광명에 사는 시민들은 이원익을 알겠지만, 이원익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는 한계가 느껴졌다. 이렇게 느껴진 것은 이원익의 묘를 찾는 과정 때문이다.
오리서원에 있는 이정표를 따라 이원익의 묘와 신도비를 향해 가다 보니 길이 끊겼다. 다른 길로 가고자 스마트폰의 지도를 활용해 이원익의 묘가 있는 장소를 확인하고 오리서원을 나와 인도로 나왔다. 한참을 걸어도 이원익의 묘로 가는 길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스마트폰의 지도를 보니 이원익의 묘에서 한참을 지나쳐 간 상황이었다. 오리서원의 주변에는 상가나 아파트가 없어서 묘의 위치를 물어볼 사람도 많지 않았다. 다행히 버스정류장에 있던 여러 명에게 물어봤지만, 그들의 대답은 이원익을 아예 모르거나 오리서원만을 알 뿐이었다.
 
사실 누가 위인들의 묘를 찾아다닐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오리서원으로 다시 들어가 철조망 건너 밭을 갈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묘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거리가 있어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중간에 사유지를 지나쳐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오리서원을 나와 주변을 살피며 걷다 보니 어떤 집으로 향하는 작은 길이 나왔다. 불법 침입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정으로 집을 지나치니 “이원익선생묘소 및 신도비”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왔다.
 

표지석을 보는 순간 너무도 기뻤다. 30분여간 거리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는 다음부터였다. 묘소가 있다는 방면으로 걸어가자 수십 개의 묘가 나왔다. 아마도 이원익의 후손들의 선산인 듯했다. 문제는 선산에 있는 묘 대부분이 커다란 묘비가 세워져 있는 등 관리가 잘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자와 번역 실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모든 묘비를 읽고 이원익 묘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다행히 이원익의 묘비의 비문을 검색하여 하나하나 비교한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어 맨 마지막에 찾은 묘가 이원익의 묘였다.

묘를 촬영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유지라 이정표를 세우는 데 한계가 있었을까? 아니면 의지가 부족한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원익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일까?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쉬움이었다.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는 되고 있지만,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이원익의 공직자로서의 삶은 대의명분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위정자와 국민에게 알려주는 표본이다. 이원익의 묘와 신도비를 방문하고 내려오면서, 이원익 같은 분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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