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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10. 2020

신익희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을



허난설헌의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익희 선생(1894~1956)의 생가가 있다. 하루면 충분히 두 곳 모두를 방문할 수 있다. 허난설헌이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면, 신익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두 사람이 산 시대는 다르지만, 누구나 꿈을 꾸고 정당한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은 같았다.

신익희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마을이다. 허난설헌 묘가 있는 곳처럼 21세기의 번잡하고 복잡한 모습보다는 20세기 후반의 정겨운 모습이 느껴진다. 신익희 생가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분명 아스팔트를 달리는 버스지만, 왠지 7~80년대처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릴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아마도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마을주민과 버스 기사의 정다운 모습이 영향을 준 듯하다.

생가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 있는 해공로 비석과 동상 그리고 어록이 적혀있는 비석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는 동안 정차된 버스에서 몸이 불편해 보이는 노인이 내렸다. 그 옆으로 노인을 부축하는 버스 기사가 있었다. 그렇게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외지인인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한동안 나누었다. 그리고 노인이 떠나간 후 버스 기사는 차 문을 열어두고 바로 앞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차량 배차시간까지 시간이 남는 듯했다. 버스 기사분은 마을회관 슈퍼를 다녀온 뒤 회관 앞 공터에 있는 운동기구를 이용하는 모습에서 향수가 느껴졌다.
 


신익희 생가가 있는 마을 이름이 서하리다. 고려 말 충신 4명이 이곳을 둘러보고 누각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마루’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마을 옆으로 흐르는 경안천에 의해 안개가 자주 낀다고 하여 ‘서하리’라고 부르지만, 마을 앞 도로는 신익희 호를 딴 해공로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사람 대부분이 도로명 주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도로명에 자부심이 대단할 것이라 여겨진다. 여기서 태어나 자란 신익희는 근현대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이다.

신익희 생가 앞에도 차를 정차할 수 있지만, 공간이 그리 넓지 못하다. 그래서 넓은 공터가 있는 마을회관에 주차하고 생가를 찾아가는 것이 좋다. 거리가 멀지 않지만, 생가로 들어가면서 처음 마주하는 담벼락에 신익희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판넬이 걸려있다. 그리고 신익희 선생이 쓴 글씨와 어록이 걸려있다. 마을주민이 자신의 집을 이용하여 신익희를 알리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정표를 따라 조금만 걸으면 신익희 생가가 나온다. 이곳은 실제 생가가 있던 곳은 아니다. 원래 위치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인데 대홍수로 가옥 일부가 무너지면서 옮겨졌다. 이후로도 개보수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부분이 고쳐졌지만, 옛 모습이 사라졌다는 아쉬움보다는 관리가 되고 있다는 안도감이 더 든다. 특히 생가를 알리는 안내판과 커다란 비는 독립운동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모습으로 비쳐 보는 내내 뿌듯함이 느껴진다.

광복 이후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들은 좋든 싫든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비판이 따라다닌다.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인물은 나올 수 없었다. 신익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신익희는 독립운동보다는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싸우던 정치가로서 기억된다.



신익희는 신립 장군의 후손으로 광주의 명문가 집안에 막내로 태어났다. 10살 무렵 조카와 노비 자제들을 가르칠 정도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더 큰 공부를 위해 신익희는 1908년 한성 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한성 외국어학교는 1895년 대한제국이 외교관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학교로서 신익희가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자 입학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그 능력을 펴지 못했다. 졸업하던 그해에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익희는 좌절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송진우‧안재홍 등을 만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동학교‧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에서 강의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서 국민의 뜨거운 독립 의지를 확인하게 된다.
 
제자들을 규합하여 남대문 역에서 만세 시위를 한 신익희는 일경의 체포를 피해 상해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이시영‧조소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하고 선포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지금의 대한민국 운영의 틀이 되었다.
 
군대를 갖추지 못하면 독립할 수 없다고 믿은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내내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군 창설을 준비했다. 그러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세력을 합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던 신익희는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가 늘 주장하던 우리의 힘으로 되찾은 광복이 아니었기에 시련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국에 돌아온 후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으나,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교육만이 자주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신익희는 우선 국민대학관(현 국민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자유신문사 사장을 맡아 국민들에게 국내외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국내외 상황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미‧소 양국은 아시아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기 위해 한반도를 분할하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을 결정했다. 이에 신익희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김구와 정치의 길이 달랐다. 이승만과 뜻을 같이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이 된 신익희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다음 국회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정치협력은 신익희가 추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을 거절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신익희는 김성수 등의 인사를 모아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며 야당을 이끌었다. 1950년 다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신익희는 국회의장에 다시 선출되면서 이승만 정부를 견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를 견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전쟁 중에 이승만은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신익희는 이승만 정부와는 달리 제대로 된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 민주국민당 대표로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1952년 경찰과 군대로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는 발췌개헌을 통과시키자 출마를 포기했다. 국민들에게 상대적으로 인기가 높은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것이 더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재선에 성공하여 독재를 이어가자 신익희는 더욱 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굳은 결심으로 제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자 많은 사람이 지지를 보냈다. 특히 한강 백사장에서 연설할 때 30만 인파가 넘게 몰려들어 환호할 정도였다. 그러나 호남 유세하러 가는 1956년 5월 5일 열차 안에서 뇌내출혈로 죽고 말았다. 열차에서 홍차를 마신 뒤, 휴지를 달라는 말이 마지막이었다는 말에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길 기대했던 많은 이들은 죽은 신익희에게 185만 표를 추모 표로 주었다. 이승만이 504만 표, 조봉암이 216만 표였음을 고려했을 때, 신익희가 죽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한다. 만약 신익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이곳 신익희 생가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누구도 예측할 순 없지만, 역사적 상상은 개인의 몫이다.
 



나오면서 신익희 어록을 읽었다. 그중의 몇 개가 계속 읽힌다. “남의 의견을 들을 줄도 또 존중할 줄도 모르는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 “사람마다 저 잘난 맛에 산다. 내가 잘 낫다 생각하면 남의 잘난 것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서로의 주장이 다를수록 타협하고 절충해서 타협점을 찾던가 또는 자기의 주장을 설득함으로써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니라.”
 
광복 이후 신익희 행동에 비판도 있었지만, 이 당시는 나라를 건국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 혼란이 가득했던 시대다. 무엇이 옳은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각자의 정답만 있던 시절이었다. 신익희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쫓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그 마음을 알기에 이곳 신익희 생가만이 아니라 신익희가 살던 가옥, 묘소 등이 서울시 기념물과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시작점인 신익희 생가와 허난설헌 묘소를 방문하여 각자만의 역사 연결고리를 만들면 어떨까? 나는 재미있는데 다른 사람도 좋아할지는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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