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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27. 2020

시집 잘 갔다고 해도 될까?



경기도 광주를 이야기할 때 꼭 경기도를 광주 앞에 넣는다. 아무래도 전라도 광주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기도 광주를 대표할 만한 것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광주에는 남한산성, 곤지암, 화담숲,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등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 장소가 상당히 많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허난설헌(1563~1589)의 묘도 광주에 있다.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인 명종 대에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허엽은 동인의 영수로 학문과 명망이 높았다. 허엽의 뛰어난 학문과 성품은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세 아들 허성, 허봉, 허균과 딸 허난설헌은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로 유명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조선 여류 시인을 대표하는 허난설헌은 오늘날까지도 모르는 이가 없다.
 


허난설헌이 8살 때 지은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은 그녀의 재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신선이 사는 궁궐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초대받았다는 설정 아래 지어진 시를 보면 어린 소녀가 지었다는 것이 당최 믿어지지 않는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농익은 표현이 느껴진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일부
抛梁南(포양남).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玉龍無事飮珠池(옥룡무사음주지),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 연못의 물 마시는데.
銀床睡起花陰午(은상수기화음우), 은 평상에 잠자다가 꽃 그늘 짙은 한낮에 일어나,
笑喚瑤姬脫壁衫(소환요희태벽삼). 웃으며 아름다운 미녀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이처럼 재주가 많던 허난설헌을 둘째 오빠 허봉이 크게 아꼈다. 허봉은 동생의 재주를 키우기 위해 당나라풍의 시를 잘 지어 삼당파 시인으로 불리던 이달을 허난설헌의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나 조선 중기는 고려부터 이어오던 여성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기였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여자에게 삼종지도와 열녀로서의 삶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허난설헌도 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5살의 나이에 안동 김씨의 김성립과 결혼했다. 결혼생활에 따라온 것은 억압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뿐이었다.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서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허난설헌이었지만, 시댁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뛰어난 재주는 흠이었다. 제 아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며느리를 본 시어머니는 허난설헌에게 매서운 시집살이를 시켰다. 아들이 기가 눌릴까 하는 걱정과 함께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인 김성립조차 허난설헌을 멀리했다. 자신보다 모든 방면에서 월등한 허난설헌의 곁에 있으면 주눅이 들었다. 그녀에게서 배울 점을 찾기보다는 도망치고만 싶었다. 매서운 시집살이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 없는 삶은 허난설헌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나마 둘 사이에서 얻은 두 자녀만이 모든 것을 이겨낼 힘을 주었다.
 
허난설헌은 아이가 잠들면 시를 써 내려가며 답답한 현실과 외로움을 이겨내려 했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였다. 그녀의 큰 버팀목이던 아버지와 둘째 오빠 허봉이 정치적 위기 속에서 객사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의 두 아이마저도 돌림병으로 목숨을 잃고, 배 속의 아기마저도 유산하였다. 삶에 절망만이 가득했다.
 



허난설헌의 묘 옆에 서 있는 시비에 <곡자>의 내용을 읽다 보면 두 아이를 잃은 그녀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 옆으로 허난설헌의 두 아이의 묘가 있다. 두 무덤 사이에 외삼촌 허봉이 조카 희윤의 죽음을 슬퍼하면 쓴 글이 한자와 한글로 적혀있다. 아마도 조카를 잃은 누이동생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곡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작년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프도다, 광릉 땅에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한 쌍의 무덤이 서로 마주하고 일어섰네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 불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귀신 불은 소나무와 오동나무를 밝히네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종이돈으로 너희들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맹물을 너희들 무덤에 따르네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알고말고, 너희 자매의 혼이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 따라 노니는 것을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비록 배 속에 아이가 있은들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어찌 장성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헛되이 「황대사」를 읊조리니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이 나와 슬픔으로 목메네
 

그리고 얼마 뒤 허난설헌은 자기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남기고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청난의채란)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난설헌이 죽은 뒤 많은 작품이 사라졌지만, 누이의 재주를 아까워한 허균이 자신이 기억하는 시와 본가에 남아있는 시를 모아 <난설헌집>을 편찬했다. 이 책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중국에서 발간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발행되어 국제적으로 유명한 시집이 되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나 암울한 삶을 살았던 허난설헌의 인생을 그나마 위로해주는 듯했다.
 


허난설헌의 묘를 보고 있자니 시간이 오묘하면서도 대단한 힘을 가졌음이 느껴진다. 안동 김씨의 시집살이로 비운의 삶을 살았으나, 지금은 오히려 안동 김씨로 인해 기억되고 있다. 허난설헌의 가문이 망하면서 고향인 강릉에는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곳 광주에는 안동 김씨 서운관정공파가 중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2만2천 평을 내주는 과정에서 허난설헌의 묘를 이곳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허난설헌의 묘가 안동 김씨 문중에 의해 보존되고 기억된다는 점이 고맙다. 허난설헌은 늦게나마 시집을 잘 갔다고 표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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