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Oct 19. 2020

불우한 인생이라 말해야 하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호로에 가면 이익(1681~1763)의 묘와 박물관이 있다. 좁은 도로와 지어진 지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로 8~9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바로 옆 동네에 비해 정체된 듯하다. 이익 묘에서 직선거리로 2km 정도 떨어진 중앙역 주변으로 고층 아파트와 안산 종합 여객자동차터미널 그리고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곳에 현대식 건물과 도로가 들어설까 걱정이 된다. 지금도 이익 선생의 묘를 중심으로 공원과 박물관 그리고 식물원과 체육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무료 주차공간도 넉넉하여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지 않고, 마음 편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곳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이익의 생애처럼 말이다.



이익은 남인 계통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생동안 겪을 어려움이 예고되는 듯했다. 아버지 이하진은 1680년 서인이 남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던 경신환국의 화를 입었다. 경신환국이란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이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서인의 고발로 많은 남인이 죽고 조정에서 쫓겨난 사건이다.
 
이하진은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운산에서 이익이 낳았다. 이하진은 막내아들 이익의 재롱도 느껴보지 못하고 이듬해 죽었다. 이익의 어머니 권 씨는 운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아이들과 선조들의 무덤과 전답이 있는 안산으로 내려왔다. 친족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남편이 없는 삶은 고달픈 하루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몸이 약해 잦은 병치레를 겪던 이익이 가장 힘든 이유였다.



이익의 몸이 얼마나 약했는지, 서너 살만 되면 학문을 배우던 친구들과는 달리 10살이 되도록 글을 배우지 못했다. 다행히 10살이 넘자 건강이 좋아지면서 뛰어난 학문을 갖췄던 둘째 형 이잠에게 글을 배웠다. 몸은 약했지만 총명한 머리와 근성은 학우들을 따라잡는 것을 넘어 더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1705년 과거 시험인 증광시에 응시했던 이익은 복시를 치르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녹명에서 자격 미달이 원인이었다. 녹명에서 확인하는 것은 응시자와 선조의 성명・본관・관직・거주지를 확인하는 사조단자와 경재소의 관헌 3인 이상이 신원을 보장하는 보단자이다. 이는 이익이 녹명에 제출하는 서류를 잘못 작성했다기보다는 남인이었기에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이었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이자 스승과 같았던 둘째 형 이잠이 죽었다.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린 이잠은 스무 번에 가까운 고문과 심문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부당한 과거 시험 자격 박탈과 형의 죽음은 이익으로 하여금 관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게 했다. 이후 이익은 안산 첨성리에 내려가 학문에 매진하며, 이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았다. 셋째 형 이서와 사촌 형 이진 등과 학문을 연구하는 시간과 노력이 쌓이면서, 이익만의 사상과 철학이 확립되었다. 관직에 나가지 않았지만, 이익의 학문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는 많은 이들이 학문을 배우고자 찾아오게 만들었다.

이익이 35세가 되던 1715년 어머니 권 씨가 돌아가시자, 집안의 집기를 비롯한 노비를 모두 종가에 보냈다. 그러면서도 형제들의 어려운 삶을 돌봐주다 보니 가계가 계속 기울어갔다. 47세가 되던 해, 이익에 대한 명성을 들은 왕은 선공감가감역을 제수했다. 그러나 이익은 관직을 거절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지켰다.
 



이익은 83세까지 장수하였으나, 오히려 70대가 삶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유일한 아들이자 예조정랑・만경현감을 지내며 집안을 책임지던 이맹휴가 병으로 죽은 것이다. 70대 후반에는 거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불편했다. 더 큰 문제는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경제 사정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1763년 83세의 이익에게 첨지중추부사로 임명하고 생계를 위한 전답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이익은 죽었다.
 
이익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현실의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업에서는 지주들의 횡포를 막고 소작농을 보호하기 위한 한전론을 제시했다. 한전론이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제한시키는 제도다. 또한 관리들이 환곡을 이용하여 부당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창제 실시를 주장하면서, 실질적인 토지 소유자가 세금을 납부하는 조세제도를 이야기했다.
 



관료의 선발에서도 과거제가 정권획득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을 비판하며, 여론과 평판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를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 양반도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중국 중심의 조선을 비판하며 우리의 것을 중요시했다.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 인식과 학문적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이익의 학문적 성과는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등 많은 실학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을 성호 학파라고 한다.
 
영조는 이익이 죽은 후 이조판서로 추증했다. 그의 학문은 당시 사회에 적용되지 못했지만, 100여 년 뒤 서구문물에 받아들이는 개화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살아서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사후 최고의 스승이 된 이익은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말할 수 있을까?


이익이 죽고 200여 년이 흐른 1977년 안산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반월공업 단지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이익의 묘를 비롯한 둘째 형 이잠, 외아들 이맹휴, 손자 이구환, 숙부 이국진 등 5위 묘를 이장하라는 공고 때문이었다. 안산을 넘어 조선 실학의 대명사인 이익의 묘가 공업화에 밀려 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지역사회와 학계는 이익의 묘를 절대로 이장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아무리 경제가 우선인 시대라 할지라도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4분의 묘는 이장했지만, 이익의 묘는 그 자리에 남을 수 있었다. 1985년 이익은 민족 문화를 빛낸 사상가 10인에 선정되었다. 만약 이익의 묘가 이장되었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익이 안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으면서 1988년 묘지 옆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첨성사와 재실 경호재를 만들어졌다. 도로변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이익의 묘는 작은 구릉 위에 있어 조금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 올라서면 맞은편에 성호 박물관이 보인다. 성호 박물관을 두고 좌측으로는 안산식물원이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성호공원과 단원조각공원이 있다.
 
이익의 묘 앞에서 고단하고 쓰디쓴 80년 인생을 이익은 어떤 마음으로 정리했을지 생각해본다. 솔직히 짧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불우한 어린 시절, 일가친척을 돌봐야 했던 책임감,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 외아들의 죽음, 노년의 가난과 불편한 몸만 본다면 너무도 불우한 삶이다. 그러나 죽기 직전 왕에게 인정받고, 많은 제자가 자신의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결코 불우하지 않다.
 



현재로 돌아오면 역사 교과서에 이익의 이름은 빠지지 않고 거론되며, 시험문제로도 자주 출제된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익의 이름을 안다. 안산으로만 와도 이익 묘 앞으로 그를 위한 성호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주변 공원도 이익의 호를 빌려 이름을 지었다. 성호 이익은 불우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답만이 끊임없이 맴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오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