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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19. 2021

학살이 자행되었던 남원성 전투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긴박했던 상황과는 달리 지루한 대치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다. 명나라 원군의 도움도 있었지만, 조선 관군의 정비와 의병의 활약이 일본의 파격 지세를 막은 주요인이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이 일본군을 경상도 일부에서 고립되게 만들었다. 일본으로부터의 군수물자의 보급이 차단된 상황에서 조선의 반격을 받은 일본군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졌지만, 일본으로 회군할 수도 없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일본으로 돌아갈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의 처벌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의 자신들의 모습을 계속 거론하며 조선에 압력을 가했다. 명군이 들어오면서 군 지휘권을 잃은 조선은 일본군의 행태를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중심의 사대 질서를 수용한 지 200년이 넘는 역사와 관행이 조선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특히 선조는 일본군을 내쫓고 전쟁을 마무리 지을 의지가 약했다. 모든 것이 명나라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결과라며, 명을 칭송하고 눈치 보기에 바빴다.

1592년 8월 17일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심유경은 일본군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무력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조선을 배제한 채 명나라와 일본군과의 휴전 협상으로 명나라군의 피해와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일본군으로 인해 삶이 무너진 조선과 백성들은 안중에 없었다.

심유경은 한양 회담에서 일본군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주고 조선에서 철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고니시는 명나라군도 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명나라 사신이 도착하며 일본으로 건너가겠다고 말했다. 이에 심유경은 명나라의 허락 없이 사용재와 서일관 두 장수를 가짜 강화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출처 : 만인의총 홈페이지

히데요시는 사용재와 서일관을 만나 자리에서 명나라를 칠 생각이 없었다고 먼저 운을 띄었다. 오히려 조선이 일본에 항복하여 일본이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주선하기로 약속한 것을 어긴 것이 전쟁 발발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그와 함께 7개의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명나라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명과 일본 사이에 관선과 상선을 왕래한다.
명나라와 일본이 통교를 서약하는 문서를 교환한다.
조선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일본은 포로가 된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송환한다.
조선은 일본에 영원한 항복을 서약한다.

심유경은 7개의 강화조건을 무시하고, 일본이 항복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명나라 조정에 건의했다.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한 명나라 조정은 항복이라는 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문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선이 빠진 상황에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강화협상은 우리에겐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 이덕형을 중심으로 많은 조정 대신들이 휴전 협정에 대한 우려를 터트렸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쟁의 주도권을 넘긴 조선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593년부터 시작된 휴전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명나라의 책봉사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조선도 서둘러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의 통신사를 만나지 않은 채, 명나라 책봉사 일행과 강화 협정을 진행했다.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596년까지 진행된 명나라와 일본 간의 휴전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책봉사 일행에게 조선의 남부 지역을 넘기지 않는다면, 전쟁을 재개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1597년 7월 자기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듯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승리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키며 초반 승세를 잡는 듯 보였다. 또한 전쟁 초기 호남지역 점령에 실패했던 것을 되갚기라도 하듯,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이후 가장 안전했던 호남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고, 심지어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남원성 전투였다.





출처 : 만인의총 홈페이지

1597년 8월에 11만의 일본군은 호남 정벌에 나섰다. 일본군 우군은 전주성을 향했고, 나머지 5만 6천 명의 일본군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했다. 당시 남원성에는 전라 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1천여 명의 병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통솔하는 3천 명의 병사가 전부였다. 8월 13일 대규모 병력의 일본군이 남원성 앞에 도달하자,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일본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망치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8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을 막는 것은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전라 병마사 이복남을 비롯한 방어사 오응정, 남원부사 임현, 구례현감 이원춘 등 모든 군관들은 목숨을 잃었다. 다만, 동문을 방어하던 명나라 부총병 양원만이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도망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양원은 훗날 남원성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요동에서 처형된 뒤, 그의 목이 조선으로 보내져 조리질 당했다.

8월 15일 23시 이후 남원성의 방어선을 뚫고 성벽을 넘어온 일본군에 의해 잔혹한 학살이 일어났다. 얼마나 잔인했는지 당시 일본 승려 경념은 <조선일 일기>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보기만 하면 죽이는 바람에 생포된 사람이 없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19일 남원성 일대를 둘러보니 길에 누워있는 시체가 모래알처럼 많아, 눈으로 보기 어렵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이토록 많은 조선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일본군이 전공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일본군의 군공을 높이겠다는 탐욕으로 1만여 명의 관군과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당시 머리나 귀를 베어 전공을 계산하던 것을, 정유재란부터는 코를 베어 보내게 하였다. 사람의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뿐이니 수급 표식 구별이 용이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더 많은 조선인을 학살하라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일본군들은 전공을 높이기 위해 닥치는 데로 자신들이 죽인 조선인의 코를 베어버리고, 그 위에 석회를 뿌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이렇게 보내진 코를 가지고 무덤을 만들었다. 이 무덤을 비총(鼻塚)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전공을 과시하는 데 사용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1598년 명나라군에 의해 남원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임진필록>에 의하면 양호에 의해 남원에 주둔하게 된 이방춘은 관사가 모두 불타고 성 안팎으로 백골이 산처럼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만인의총의 전신으로 옛 남원역 뒤편 초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도 1612년 광해군 4년에 이복남, 임현, 임원춘 등을 모신 사당을 세워 남원성을 지키다 순국한 장수들을 추도했다. 효종은 충렬사라는 사액을 내렸고, 1675년에는 북문 근처인 동춘동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만인의총에 대한 제향 활동이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일본군에 끝까지 저항한 조선의 민족정신과 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는 데 실패했다. 광복 이후 남원 사람들은 만인의총을 찾아가 제향 활동을 하며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 결과 1963년에는 사적 제102호로 지정되었고, 1년 뒤인 1964년 충렬사와 함께 현 장소인 향교동 왕산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2016년에는 국가 문화재청이 만인의총을 관리하며, 국난을 맞이하여 순국했던 분들의 정신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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