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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09. 2021

현장답사의 중요함을 알게 해 준 당항성


한강 하류 유역은 백제가 성장했던 지역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열려있어 고구려‧백제‧신라는 한강 유역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실제로 서울과 인천이 있는 한강 하류를 점령한 국가가 삼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5세기까지 서울을 수도로 삼았던 백제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일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떨쳤다. 6세기에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최대 전성기를 누리며, 중국의 왕조가 신하로 자처할 정도였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수도를 수복하여 옛 영광을 되찾고자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중국과의 경쟁으로 남쪽을 신경 쓰지 못하던 고구려에게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강원도 지역의 한강 상류는 신라가 갖고, 서울과 경기 지역의 한강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약속에 맞춰 영토를 분할하자, 신라는 배가 아프고 욕심이 났다. 신라가 국력을 확장하는데 산이 많고 인구가 적은 한강 상류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한강 하류 지역으로 눈이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강 하류 확보가 신라에겐 꼭 필요했다.

백제의 눈치를 살피던 신라 진흥왕은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시점이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진흥왕은 과감히 나‧제 동맹을 깨고 백제를 내쫓고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그리고 당항성을 한강 하류를 지키는 근거지로 삼고,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이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초중고 시절 역사 시간에 빠지지 않고 선생님들이 강조하면서 각종 역사 시험에 단골 문제로 출제했다. 나도 학창 시절 당항성에 관련된 내용을 수없이 배웠고, 교사가 되어서는 학생들에게 매번 강조하며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왜 신라는 서울과 인천이 아닌 화성에 있는 당항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이곳을 결사적으로 지켰던 것일까? 여전히 머릿속에는 경기도 화성 지역이 서울과 인천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당항성에 올라가는 순간, 글과 그림만으로 배우는 지식이 얼마나 얕을 수밖에 없는지를 철저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선조들의 지혜와 혜안에 탄복하게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이런 지혜를 갖추었는지, 연신 감탄의 소리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항성이라 배웠던 이곳은 고구려가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한 후 당성으로 불렸다. 당성이 있는 지역은 바다와 평야가 만나는 지역으로 쌀을 포함한 여러 곡물이 잘 자랐고, 고대 사회의 가장 큰 재원이던 소금도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신라는 당성을 점령한 후 이름을 당항성으로 바꾼 뒤,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곳의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수비했다. 무엇보다도 중국 당나라로 사신과 교역 물품을 보내는 주요 항구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당항성은 금과 은 등 귀금속류와 함께 인삼과 바다표범 가죽 등을 당나라에 보내고, 중국의 물품을 받는 첫 번째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당항성에서 객사를 뜻하는 ‘관(館)’, 관청을 뜻하는 ‘사(舍)’가 새겨진 기와가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당항성에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관사나 창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신라는 당항성에 군대를 주둔시켜 방비를 철저히 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당성이 있는 구봉산은 해발 165m의 작은 산에 불과하다. 당성도 둘레가 1,200m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산성이다.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는 지금의 당성보다 작은 규모여서 아마도 당항성은 많은 군대를 주둔시키는 군사기지보다는 적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백곡리 산성 등 주변 지역의 군대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까지 22동이 당성 내에 존재했음이 밝혀졌는데, 그중 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1차 성벽 안에 16동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 왕실이 당항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당항성의 정상부에 있는 망해루가 있던 장소에 올라가 보면,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게 된다. 당항성이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주변 산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만큼 산성에 오르기 전 실망감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서면 남쪽으로는 한강이 바다와 만나는 전곡항에서 동쪽으로는 시화호를 넘어 인천 송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전곡항과 인천 송도까지 직선으로만 30km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뿐만 아니라 180도 이상의 넓은 장소를 관찰할 수 있다. 여기에다 침략하는 적군이 전곡항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경우 적군의 규모를 파악한 뒤, 맞은편 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와 협공하기에 매우 적합한 구조를 가졌다.

동쪽으로는 산들이 펼쳐져 있어 인근 지역과 중앙 정부에 적의 침임을 알리는데 효과적인 지리적 이점을 갖추고 있다. 정리하면 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한눈에 살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침입 소식을 알리며 즉각적인 대처를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당항성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산 중에서 많은 인원이 주둔하면서 넓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을 찾은 선조들의 혜안에 감탄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궁금증이 해소되면서 답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재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항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부터 전략적 요충지에서 교역과 문화교류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당항성에서 중국 당나라와의 교역 물품이 활발하게 거래되기도 했지만,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나려는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이 중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의상대사도 있다. 원효대사와 함께 고구려를 통해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가 실패했던 의상대사는 이곳 당항성을 통해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670년 당나라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 당항성을 통해 귀국하여 경주로 향했다.

설화에 따르면 중국에 도착한 의상대사를 선묘라는 여인이 흠모했다고 한다. 선묘는 여러 번 의상대사에게 마음을 표현했지만, 의상대사는 조금의 마음도 주지 않았다. 결국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은 선묘는 멀리서나마 의상대사가 큰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공부하는데 필요한 대소사를 챙기며 도와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선묘였지만,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선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의상대사가 당나라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신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선묘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항구로 뛰어갔으나, 의상대사를 태운 배는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선묘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고, 힘없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를 가엾이 여긴 하늘은 선묘를 용으로 환생시켰다. 용이 된 선묘는 살아생전과 마찬가지로 의상대사와 일정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으로부터 의상대사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먼 바닷길을 건너 의상대사와 함께 첫발을 내디딘 장소가 당항성이었다. 이 외에도 범일, 무염, 이엄 등 신라의 고승들이 당항성을 통해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했던 당항성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남북국시대, 그리고 고려말 조선 초까지 성곽이 보수되고 성의 크기는 넓어졌지만, 과거의 전략적 요충지는 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곽은 무너지고, 성문은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의 당항성에는 성문이 없다. 단지 성문이 있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또한 건물이 있던 자리만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당항성을 둘러싼 역사는 잊히지 않았다. 당항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계속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과거의 모습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특히 화성시는 향토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당항성을 복원하고 있다. 당항성에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화성당성 방문자센터를 세워, 방문하는 이들에게 당항성의 역사를 알리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이야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 몇 년 후에는 화성을 대표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 기대된다.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가볍게 산책을 하기에도 매우 좋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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