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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08. 2021

원효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수도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승을 꼽으라면 아마도 원효대사(617~686)가 1순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원효대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승들과는 달리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 행동을 아무 거리낌 없이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승려로서 술과 고기를 먹고, 과부와의 만남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은 그야말로 파계승이나 하는 행동으로 많은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지탄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행동이 원효대사를 고승의 반열로 오를 수 있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원효대사의 행동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비치면서 사람들은 초월적인 존재라고 평가했다.

물론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던 배경에는 원효가 당나라에서 유학 생활을 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불교국가들이 인정한 뛰어난 학승이었다는데 있다. 원효대사가 저술한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을 당대의 모든 승려들이 읽고 공부했으며, 지금에도 승려들과 불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은 꼭 읽어야만 하는 필수서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불교 교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층 더 발전시킨 원효대사의 정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원효대사가 활동하던 시대의 불교는 국가를 초월하여 이념적 대립으로 여러 종파로 나누어져 자신들만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던 때였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어느 스승에게서 배웠느냐에 따라 승려가 운용할 수 있는 활동의 폭을 좁혀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승려가 스승의 논리를 따르다 보니 다른 주장을 받아들일 식견을 갖추기 어려웠고, 스승에게 배운 내용과 다른 주장을 받아들이면 배신자의 낙인이 따라왔다.

그렇다 보니 불교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더 교리가 난해해지고 어려워졌다. 결국 이런 모습은 불교가 대중들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문제점을 가져왔다.
당시 불교의 종파 대립으로 생기는 여러 문제를 해결한 것이 원효대사였다. 어찌 보면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불교가 성립된 인도와 동아시아의 불교를 선도하고 있는 중국의 승려들도 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아시아의 작은 나라였던 신라의 승려가 해내리라는 상식적으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더욱이 원효대사는 골품제로 엄격한 신분제의 나라였던 신라에서 중앙귀족 출신도 아닌 지방 귀족 출신이어서 큰 승려로 성장하는데 신분과 지역이라는 제약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원효는 특정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 어찌 보면 여러 제약으로 특정한 스승을 두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원효대사 스스로 열린 마음으로 여러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이 원효대사가 어느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스스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어찌 보면 원효대사의 행동이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본다면 원효대사의 선택과 행동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학교, 지역, 친인척 등 인맥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한다. 더욱이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 인물과 가까이하면, 자신이 한층 더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반면 인맥이 없는 경우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더라도 비주류로 분류되어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원효대사가 당시 사회에서 비주류였던 원효가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에 대한 정답이 원효와 관련된 설화에 있지 않을까 싶다. 원효와 관련된 많은 설화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해골에 담겨있는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일 것이다. 원효대사는 젊은 시절 의상대사와 함께 선진 불교를 배우기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다. 둘은 고구려를 지나가는 육로를 걸으면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구려 땅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군에게 신라의 첩자로 오인당하여 체포되면서 신라로 되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넘어가 큰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불도를 깨우치고자 하는 마음을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당나라로 유학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육로가 아닌 안전한 해로를 통해 당나라에 건너가기로 선택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서해를 향했다. 부지런히 걷던 중 바다가 보이는 평택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자, 둘은 한밤중의 한기를 피하고자 동굴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먼 길을 걸어온 만큼 둘은 고단했고, 동굴이 불편한 장소임에도 자리에 눕는 순간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동이 아직 트지 않은 새벽 무렵 원효대사는 심한 갈증으로 잠에서 깼다. 원효대사는 타는 듯한 갈증에 목을 축일 만한 물을 찾아 손을 내밀어 물병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물병은 비어 있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찾은 원효대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이 담겨있는 바가지를 찾았다. 원효대사는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바가지에 담겨있던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고, 행복하게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해가 하늘에 떠오르면서 날이 밝아지자, 잠에서 깬 원효대사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한동안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새벽에 그토록 시원하게 마셨던 물이 썩어서 악취로 가득했고, 바가지는 해골이었기 때문이었다. 원효대사는 자신이 이토록 더러운 물을 마셨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게웠다. 곧이어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고, 썩은 물인지 모르고 마셨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원효대사의 머리를 크게 울리는 묵직한 깨달음이 몰려왔다. 이 세상 만물은 늘 같은 자리에서 변함이 없는데,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토록 시원하게 느껴졌던 청량한 물이 구토가 일어나게 만드는 역겨운 물이 된 것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신이 원하는 배움이 당나라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학문성취는 물론 불도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답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동시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소중한 보살로 존중받아야 함에도, 신분과 직업 등 외적인 요소에 의해 평가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낮은 하층민들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였다. 그들보다 좀 더 많은 지식을 배워 익히고, 좀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좀 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것에 불과한 자신이 얼마나 큰 편견과 오만을 하고 있었는지를 아는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생각과 깨달음이 원효대사의 머리와 가슴속으로 밀려 쏟아졌다.





원효대사에게 당나라 유학은 더는 의미가 없어졌다. 당나라가 아닌 바로 이곳 신라에서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나라로 같이 떠나자는 의상대사의 말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설화라고만 느껴지는 원효대사의 해골 물과 관련 있는 장소가 경기도 평택 수도사에 있다.

수도사는 852년(신라 문성왕 14)에 염거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도사가 원효대사 사후 대략 200년 후에 건립된 만큼 원효대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도 오늘날 우리가 어떤 의미를 두고 보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수도사는 불교와 평택시의 소중한 보물이다. 염거가 수도사를 창건하기 이전에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라는 점에서 이곳에 작은 암자가 세워졌고, 여러 승려가 머무르며 불도를 닦았다. 이후 염거가 신라의 불교 성지라 불릴 수 있는 이곳에 수도사라는 큰 사찰을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불교의 쇠퇴와 함께 수도사도 여러 수난을 겪으며 여러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1911년 대화재로 폐허가 된 수도사가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로 알려진 것은 정암스님의 공이 컸다. 1965년 정암스님은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어 낸 원효대사의 뜻을 따르기 위해 수도사를 중수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수도사를 가보면 규모가 큰 사찰이라고 느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작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상 깊었던 것은 수도사가 자리한 위치였다. 보통의 사찰이 마을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있는 것과는 달리 수도사는 마을의 한 자락에 위치한다. 일반적으로 사찰이 산에 있다고 생각하던 나는 수도사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오기 전까지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지 불안감이 살짝 오기도 했다.





그러나 곧 원효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사의 위치를 보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수도사 대웅전 앞에는 성악가를 비롯한 여러 음악가의 공연과 한·중·일 사찰음식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다. 텔레비전에서 본 음악가를 사찰에 초청하여 지역주민들과 함께 즐기는 문화행사를 주관한다는 것이 너무도 신선했다. 일반적인 사찰 주관 프로그램과 성격이 차별화되어있다는 점에서 수도사가 불교와 사찰문화에 대한 고정적인 틀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수도사는 중건된 지 오래되지 않아 눈에 띄는 오래된 유물과 유적이 없지만, 이를 보충할 수 있는 것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봉안 석탑이 있다. 그러나 봉안 석탑보다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은 대웅전 앞에 놓여 있는 두 개의 포대 화상 석상이다. 포대 화상은 중국 오대 시대의 긴 막대기와 포대를 가지고 동냥한 음식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후량의 고승으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무래도 수도사가 원효대사가 중생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했던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포대 화상을 설치해놓은 것 같다.





대웅전 좌측에 있는 명부전 옆에는 원효대사의 출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삶과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부조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평택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이 있다. 체험관 내부는 원효대사의 생애와 설화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해놓았다. 가볍게 기록물을 읽고 한쪽에 있는 동굴모형을 따라 들어가면 커다란 화면에서 원효대사와 관련된 영상이 나온다.

영상이 끝날 무렵에 바닥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여러 구의 해골이 내 발아래로 나타난다. 영상에 몰입해있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해골의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되지만, 곧 원효대사와 해탈수의 의미를 되짚어 생각해보게 된다. 이후 체험관을 나와 대웅전 뒤의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해탈수”라 적힌 벽돌로 지어진 작은 건물이 나온다. 이곳에 있는 페달을 발로 누르면 정면으로 보이는 해골 모형에서 물이 나온다. 수도사의 재치 있는 모습에 작은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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