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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pr 26. 2022

일본군을 물리친 귀신 군대 1/3

                                종묘 창엽문


임진왜란 초기의 조선은 저항다운 저항 한번 없이 일본군에게 한성으로 오는 길을 내주었다. 일본군은 선조 25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이후 제대로 된 전투도 치르지 않고 보름 만에 조선의 수도 한성을 점령했다. 반면 조선의 국왕 선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백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 왕이 도망치는 판국에 관찰사와 수령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군에 두려움을 느낀 장수와 병사들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말만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그때마다 백성들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느 위정자도 자신들을 지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보호해 달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한성의 가장 중심부에서 아군의 피해는 1명도 없이 일본군을 내쫓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선조실록은 종묘에 들어온 일본군을 내쫓은 것이 신병(神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에서 공식적인 첫 승리는 5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함대를 무찌른 옥포 해전이다. 그러나 이보다 이른 5월 3일, 종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1572~1655)를 상대로 신병이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남별궁으로 쫓아냈다고 하니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첫 승리이면서 일본군 총사령관에게 첫 패배를 안겼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주체가 신병, 즉 귀신으로 이루어진 군대라는 점에서 과연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임진왜란 초기의 조선이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16세기 이후 사화와 당쟁으로 정치와 경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으면서 국방도 무너졌다. 훈구파의 부정부패로 백성의 삶이 파탄 난 상황에서도 위정자들은 백성의 삶을 외면한 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당쟁만 일삼았다.      

                                  종묘가는 길


나라와 백성을 생각지않는 위정자들로 인해 삶의 기반이 무너진 백성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군역을 떠넘기는 대립제와 방군수포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싸울 수 있는 조선의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군인이 없으니 각 고을이 독자적으로 병력을 모아 적군을 맞아 싸우는 진관체제는 무용지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면 각 읍의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지정된 장소로 집결한 뒤, 중앙에서 파견한 병·수사가 군대를 지휘하는 제승방략을 조선 중기부터 운영하였다.      


그러나 막상 임진왜란 당시 대규모의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자, 제승방략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각 고을의 수령과 병·수사는 군대를 모집하여 약속된 장소로 가기보다는 제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여진족 이탕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이 있던 이일은 경상도 상주에서 일본군을 만나자마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종사관이던 윤섬이 도망치는 이일을 향해 “국은이 망극한데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느냐? 남자가 절개를 지키고 의를 위해 죽어야지.”라고 꾸짖으며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도망치는 장수는 이일만이 아니었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였던 원균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자신이 타고 갈 병선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바다에 수장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제승방략으로 그나마 모은 오합지졸을 데리고 조선을 지키고자 한 신립(1546~1592) 장군은 험준한 조령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자는 김여물의 주장을 거절했다. 여진족을 상대로 큰 승리를 여러 번 거두었던 신립은 병졸이 탈영하는 것을 막으면서 결사 항전할 장소로 충주 탄금대를 선택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은 대단했고, 밤새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탄금대에서 조선 기마병의 기동력이 봉쇄되면서 결국 일본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선조는 믿었던 신립 장군마저 패배했다는 소식에 일본군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 대장으로 삼은 뒤 이전을 좌위장, 변언수를 우위장, 박충간을 순검사로 임명하여 한성을 지키게 하였다. 도원수로는 김명원, 부원수에는 신각을 임명하여 한강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부터 도망갈 준비를 하는데, 한강과 한성을 지켜야 하는 관료와 병사들이 제자리에 있을 리 없었다. 수성 대장 이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이 왜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이탈하자, 남아있던 7,000여 명의 병졸도 각자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장에서 도망쳤다. 오로지 부원수 신각(?~1592)만이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양주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신각의 승리는 지상에서 거둔 조선군의 첫 승리였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탈했다고 도원수 김명원이 잘못된 보고를 하는 바람에 신각은 처형당하고 말았다. 



------다음 주에 2편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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