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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03. 2022

일본군을 물리친 귀신 군대 2/3

반면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20만여 명의 군인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한성으로 진격했다. 한 무리는 양지와 용인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오고, 나머지 군대는 여주와 이천을 거쳐 용진으로 올라왔다. 한강 남쪽 언덕에 도착한 일본군이 조선군의 방비 상태를 떠보기 위해 거짓으로 헤엄쳐 건너려 하자, 한성과 한강 방어를 맡은 장수와 병졸은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싸우지도 않고 물러나는 것을 보고 함정이 아닐까 우려했다. 하지만 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흥인문 가까이에 도달할 때까지 조선의 병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에게 들어오라는 듯 흥인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자신들을 성내로 끌어들인 뒤 일시에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조선군의 작전이라 생각한 일본군은 우선 십수 명의 군사를 뽑아 한성 곳곳을 살펴보았다. 선발대가 한성의 가장 중심부인 종루까지 들어와도 조선군은 1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조선군이 모두 도망갔음을 확인하고 안심한 일본군은 한성으로 무혈입성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400km에 가까운 길을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장한 채 걸어왔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부르튼 발로 인해 간신히 거동하는 자가 많을 정도로 일본군 내에는 싸울 수 없는 병졸이 많았다. 만약 왕이 도망가지 않고, 한성과 한강의 수비를 맡은 장수와 병졸이 죽기 살기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왕이 백성을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게 된 관군과 의병이 한성으로 올라왔다면, 오히려 일본군을 포위하여 섬멸함으로써 임진왜란은 쉽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한성에 입성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불과 20살에 불과한 어린 장수였다. 100년간의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에도 뛰어난 명장이 많았을 텐데, 약관에 불과한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사령관이자 제8군 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큰 이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비젠 지역을 영지로 삼은 우키타 히데이에를 양자로 삼을 정도로 매우 총애했기 때문이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우키타 나오이에가 죽기 직전 아내와 10살 된 아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돌봐 달라고 부탁하면서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부인을 자신의 첩으로 삼고, 우키타 히데이에는 양자로 삼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키타 히데이에를 얼마나 아꼈는지, 자신의 이름 중 ‘히데(秀)’를 사용하도록 허락해줄 정도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양녀를 우키타 히데이에의 아내로 주면서, 모든 이들에게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었다. 우키타 히데이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과 총애에 어긋나지 않게 기슈, 시코쿠, 규슈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며 보답했다.      


이후 어린 나이에 일본군 총사령관이 되어 조선에 들어온 우키타 히데이에는 보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조선의 수도 한성에 입성할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선의 왕 선조를 잡아 항복만 받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갖게 된다는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한성에 입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좌절하고 분노했다. 전쟁에 지면 깨끗이 항복하고 할복자살하는 일본과는 달리 조선의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조선 왕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서 조선 왕을 잡아야 한다는 중압감이었다.      

선조가 사라진 것에 화가 난 우키타 히데이에는 분풀이로 조선 왕이 머물던 궁궐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일설에는 선조가 도망간 것에 화가 난 백성들이 궁궐을 불태웠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리고 도망친 선조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왕릉을 파헤치고 도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또한 선조가 선왕들의 위패를 가지고 도망갔다는 말에 보란 듯이 종묘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온갖 모욕을 주고자 노력했다. 조선이 효를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여기는 나라인 만큼, 선조가 더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한성으로 되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선조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예상 범주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선조가 자신의 잘못은 아랫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떠넘기고, 공로는 혼자서 독차지하는 소인배라는 사실을 우키타 히데이에는 알지 못했다. 이 당시 선조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만행에 복수를 다짐하기는커녕, 제 목숨만 구하기 위해 명나라로 망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주 마지막 편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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