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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14. 2021

삼국 통일 이후 신라가 해야 할 일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진짜 문제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였다. 우선 700년 가까이 다른 나라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앞으로는 신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다. 그리고 여러 계통의 진골 중에서 왕이 된 무열왕계 후손들은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며 왕위 계승권을 독점해야 했다. 또 과거보다 넓어진 영토와 인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야했다.
 




우선 신라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제도가 중앙군 9서당이었다. 서당(誓幢)이란 경주에 머물면서 왕을 호위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직속부대로 왕권의 기반이 되는 매우 중요한 군대다. 신문왕은 기존의 서당을 신라(3)·고구려(3)·백제(2)·말갈인(1)으로 구성된 9서당으로 확대 편성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백제 유민도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다시 말하면 신라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두 번째로 무열왕계 자손들이 왕위를 독점할 수 있도록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제거해나갔다. 신문왕(재위681~692)이 장인이던 김흠돌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진골 귀족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확립해나갔다. 혜공왕(재위 765~780)은 미추왕을 김씨의 시조로 삼고, 삼국 통일한 무열왕과 문무왕을 조종(祖宗)으로 삼았다. 그리고 할아버지 성덕왕과 아버지 경덕왕을 5묘제로 칭하면서 무열왕계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또한 진골 귀족들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귀족 회의기구인 화백 회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귀족의 대표격인 상대등을 견제하기 위해 왕의 직속 기구인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승격시키고, 집사부의 장관도 중시(中侍)에서 시중(侍中)으로 높였다.


세 번째로 한층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활용하였다. 신문왕은 685년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지방에 5소경을 설치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다. 신라의 5주를 바탕으로 백제와 가야 지역에 4개의 주를 더 설치하여 전국을 총 9개의 주로 운영하였다. 주에 파견된 총독은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의 역할보다는 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주 밑에는 120군 305현을 설치하여 현령(縣令)과 소수(少守)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리를 감시·통제하기 위해 감찰의 기능을 가진 외사정(外司正)을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신라의 수도 경주가 동남쪽에 치우친 것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경주에서 먼 지방 세력을 감시·견제하면서 중앙의 명령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5소경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충주(국원소경), 원주(북원소경), 김해(금관소경), 청주(서원소경), 남원(남원소경)에 설치되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교통이 발달하고 주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든 지역에 관리를 파견할 수 없었던 신라는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5소경에 강제 이주시켜 관리하였다.
 




신라는 제29대 무열왕에서 36대 혜공왕 때까지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오면서, 삼국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제도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을 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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